이곳 남한에서는 사람이 쉴 수 있는 공간이라면, 특히 기차역이나 고속터미널 등 사람들이 잠시 머물 수 있는 곳이라면 텔레비전이 설치되어 있어 누구나 편안히 지루하지 않게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가 있습니다. 하기에 시민들은 수시로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경기를 편하고 그리고 자유롭게 시청할 수가 있습니다.
요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평창 동계올림픽을 시청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달리는 기차나 버스안과 자가용 승용차 안에서도 그리고 일하는 사무실과 음식점에서도 또한 밥을 먹으면서도 손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않는답니다. 저 역시 잠시 잠깐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많은 사람들과 함께 북한 ‘삼지연 관현악단’의 공연을 보았습니다.
예쁜 얼굴에 예쁜 무대 옷을 차려 입고 심수봉의 노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등 이곳의 남한노래를 많이 불렀는데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는 내내 “북한 배우들이 예쁘다”, “한민족은 한민족이네”, “참 잘 부르네” 칭찬과 동시에 눈에 눈물이 글썽해 있었습니다. 그 많은 노래 중에 마음이 짠해지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꿈과 같이 만났다 우리 헤어져 가도,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메어 소리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 라는 노래였습니다. 고향에서 군에 입대하는 동창들을 바래며 이별가처럼 자주 부르고 듣던 노래였거든요. 저에게는 왠지 새롭지가 않고 그냥 내 고향 평양 만수대예술극장에서 관람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고향 생각이 문득 났습니다. 내가 고향에 있을 때에는 왕재산경음악단과 보천보전자악단이 최고였거든요. 렴청, 전혜영, 김경숙, 이분희 등 가수들의 공연이 나온다면 그 시간만은 모든 것을 중지하고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20평되는 집이 좁을 정도로 동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마치 성냥갑처럼 꽉 찬 사람들을 위해 창문을 활짝 열고 부채질을 해가며, 울고 보채는 아이들을 달래가며 보곤 했었거든요. 아들을 출산한지 겨우 일주일도 안 되었건만 텔레비전 시청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편안히 쉬지도 못한 기억이 새록새록 나기도 했습니다.
체육과 예술은 이미 남과 북이 통일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기도 하네요. 이곳 남한 가수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북한을 방문해 남한 노래를 많이 불러 남한 가수들의 이름까지 기억 할 정도이거든요. 하기에 요즘 북한 주민들은 이곳 남한 노래를 애창곡으로 사랑하고 많이들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80년대 중후반에는 중국연변 노래라고 숨겨 가며 불렀거든요. 마음 아픈 일이지만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조선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박정희역을 담당한 배우가 이곳 남한 노래 ‘낙화유수’를 부르는 장면이 있거든요. 잘 아는 젊은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동료의 결혼식에서 술에 취해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낙화유수’를 멋지게 불렀습니다. 하지만 세포비서가 문제를 만들어 관리소로 끌려갔거든요.
그는 항상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희망이었습니다. 꿈도 이뤄보지 못한 채 온 가족이 밤사이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나이 많은 그의 이모님은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지만 하소연 한 마디 못했습니다. 남들 다 자는 밤에 제 집을 찾아온, 머리가 흰 그의 이모는 가슴을 움켜쥐고 영화 제목만 몇 번이고 외우면서 소리없이 하염없이 울던 모습이 아직도 잊혀 지지 않네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는 직장 동료를 잘못 만난 탓도 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난 탓도 있겠죠.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 친구는 노래를 마음껏 불렀을 것인데, 아니 가수의 꿈과 희망을 가지고 마음껏 자유롭게 희망과 꿈을 이루기 위해 이곳 남한으로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열차가 도착한다는 안내원의 방송이 울려 나오네요.
열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비록 이곳 남한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호와 찬사를 받으면서 노래를 불렀지만 그들에게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자유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니 마음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북한 삼지연관현악단 단원들이 부르는 노래와 함께 잠깐 고향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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