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자) '통일의 주축, 장마당세대' 61화 진행에 김진국입니다. 북한을 경험하고 북한을 전공하고 있는 북한 출신 여성 장마당세대의 유쾌하고 진지한 통일수다로 전해드립니다.
(진행자) 양강도와 회령, 무산, 연사군 출신인 한국 정착 여성 석사, 박사 학위 과정 학생들이 남한의 생활과 전공인 북한을 이야기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박세영) 저는 신라대학교 사회복지학 석사를 했고 국제지역학과에서 박사 수료를 했습니다. (변선숙) 고향은 함경북도 무산이구요. 충남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북한학과 석사 과정의 졸업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김민세)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고, 카톨릭대학교에서 상담심리학 석사 과정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정영희)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에 재학 중입니다.
(진행자) 자신이 경험해 본 북한 장마당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이번에는 김민세 씨의 장마당 추억이나 기억을 들어보겠습니다.
(김민세) 저도 98년도에 탈북하다 보니 예전 장마당 추억을 가지고 있는데, 2000년대 장마당을 경험하신 분들과는 조금 다르더라고요. 제가 경험했던 장마당은 제가 살았던 곳(연사군)은 1992년부터 장마당이 시작됐어요. 북한이 처음에는 시장을 막았어요. 하지만 먹을 것이 없으니까 시 장을 허용하더라고요. 그러다가 너무 활성화가 되니까 또 단속을 하는 것이 반복됐습니다. 시장 단속반들의 힘이 쎘습니다. 그들이 잘먹고 잘살았기 때문에 단속반들을 부러워했던 기억도 납니다. 제가 기억하는 시장은 저희가 살던 곳도 시장이 열렸지만 제가 1993년도와 1994년도에 청진에서 살았기 때문에 청진의 장마당을 기억합니다. 수남시장, 나남시장 모두 가봤습니다. 북한은 공산주의이기 때문에 모든 공급이 국가에서 일률적으로 통제하는 체제인데요. 공급이 잘안되기 시작하자 식료품 가게에서 물품들이 얼마 없었는데, 장마당에서는 이것저것 다 고를 수 있고 거래되니까 사람들이 장마당을 많이 이용했어요. 제가 양강도에 갔었을 땐 아주 충격을 받았는데요. 북한은 (그당시) 바나나가 없었어요. 양강도 시장을 가보니 바나나를 팔고 있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한테 북한의 장마당은 북한 사람의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1990년 전에는 10일이나 20일 장이라고 가끔 시장에 열렸는데 1990년 지나가면서 거의 매일 시장이 열리더라고요. 단속그루빠가 뜬다고 하면 며칠은 시장이 닫혀요, 그러면 사람들이 아우성이나요, 그럼 시장이 열려요. 그런 형태가 반복됐던것 같아요. 저도 장사를 많이 했는데 시장에서 장사를 하지는 않았어요. 장사를 동(구리)장사 오징어(북한의 낙지) 등 해산물 등 금속장사부터 해산물 장사까지 다 했어요. 연변 쪽에서 들여오는 중국의 옷을 내륙 쪽으로 가져가서 팔고 낙지를 가져와서 중국 쪽에 넘기는 일도 했습니다. 시장에도 한 두 번 정도 나가서 장사를 해보려고 했지만 창피하기도 하고, 일단 안 팔려요, 장사 수단이 없어서 였는지,, 그런 기억들이 남아 있습니다.
(유정) 저는 장마당에서 장사를 했던 경험은 없지만 장마당에서 장사하시던 분들의 모습들과 갖고 싶었던 물건들 가격 이런 것들은 기억하고 있는데 오늘 참가하신 분들의 말씀을 듣다보니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나서 고향 생각이 많이 납니다.
<지금 북한의 장마당으로 돌아간다면>
(진행자) 90년 대 2000년 대 초반 장마당에 대한 기억들을 나누시니 듣고 계신 다른 분들은 '아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네요. 그리고 이 프로그램이 방송되면 북한의 청취자분들이 여러분의 예전 장마당 추억을 들으면서 '아 그때는 그랬지, 하지만 요즘에는 달라졌어'라고 반응을 할 수도 있을거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가 다음 질문을 드리게 되는데요. 청취자분들이 여러분들의 소비자가 된다고 가정하고 지금 북한으로 돌아가서 장마당에서 팔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변선숙) 저는 장사나 경영 자체를 어렵게 생각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장사(비즈니스)는 저하고 맞지 않는 것 같다 입니다. 장사가 나하고 안 맞기도 했고 너무 힘들었어요. 북한에 있을 때 어릴 때는 집이 어느 정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신 뒤 결혼을 했는데 그때부터 살림살이가 힘들어졌습니다. 장사와 관련해서는 깊이 생각은 안해 봤는데요, 한국에서도 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교회가 참 많더라구요, 두번 째는 커피숍이 많더라고요. 저 혼자 음악들으며 생각할 수 있는 공간, 여유롭게 차 한 잔 마시면서 사람들과 얘기 나누는 공간인 커피숍이 참 좋더라고요. 만약에 내가 통일이 되어서 북한으로 돌아가서 장사를 한다고 하면 어릴 때 살았던, 어머니의 채취가 남아 있는 고향집을 찾아서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집을 되찾아서 커피숍을 조그맣게 차려서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이 방송을 준비하면서 해 보았습니다. 희망 사항이고요 죽기 전에 고향집에 단 한 번이라도 가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진행자) 녹차와 커피를 말씀해 주셨는데요, RFA 자유아시아방송이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커피를 파는 곳이 **벅스라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별다방이라고도 부른다면서요, 변선숙 씨 얘기대로 북한 고향집에 별다방 대신 주인의 성을 따서 '변다방'을 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세영) 제일 곤란한 질문이네요. 북한에서는 차도 몰고, 쌀도 나르고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별거 별거 다 했지만 한국에 와서 경제 개념이 다 없어졌어요. 그래도 신발 장사를 해 봤으니 돌아간다고 해도 신발 장사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더이상 장사는 안하고 싶고, 북한에 돌아간다면 사회복지 일을 하고 싶습니다.
(진행자) '북한 전공 탈북 여성들의 유쾌한 통일 수다' 다음주에 계속 이어집니다.
(진행자) 세대와 지역의 인식 차이를 넘어서 한반도 미래의 길을 찾는 나침반이 되려는 '통일의 주축 장마당세대' 제61화를 마칩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김진국입니다. 청취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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