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수경 lees@rfa.org
오늘은 미국 매릴랜드 주에 거주하는 올해 80살인 장병혁씨 사연을 들려드리겠습니다. 평북 의주가 고향이라는 장씨는 북한 당국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서 해방 직후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났다고 합니다.
벌써 60년 전, 19살 때 고향을 떠났다는 장병혁씨는 가끔 고향 생각이 날 때마나 컴퓨터를 켭니다. 미국의 한 인터넷 회사가 제공하고 있는 인공위성으로 찍은 고향사진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갈 수 없는 고향 땅이기에 사진으로나마 옛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이미 사진 속의 고향은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장병혁: 컴퓨터로 지도를 보니까 옛날 기와집은 하나도 볼 수 없고, 옛날 고향 생각이 전혀 나질 않아요. 그때는 집이 기와집으로 군데군데 골짜기 마다 많이 있었는데 컴퓨터로 보니까 하나도 없고 교회 건물로 컸는데 교회 건물도 다 없어지고.
장병혁씨는 아버지가 교회 장로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때문에 장씨는 어릴 적 교회에서 친구들과 놀던 일, 그리고 일제 치하에서 부모님들이 몰래 종교 모임을 갖던 일등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합니다. 그러다 해방을 맞았고 장씨의 가족은 진정한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공산주의 체제가 기독교를 박해하자 장씨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학생운동이었던 1945년 11월 신의주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됩니다.
장병혁: 해방되면서 이북의 교회가 자유 로와 지니까 큰 부흥이 일어났어요. 그때 해방되면서 이북 공산군이 들어왔잖아요. 각 교회에서는 반공 사상이 대단했거든요. 그래서 일어난 것이 신의주 학생운동이었어요. 내가 다니던 중학교가 남 신의주에 있었는데, 우리가 간부 회의에서 약속하기를 오후 2시를 기해서 어느 학교는 도청서를 어느 학교는 보안서를 이렇게 맡은 것이 있었어요. 전 학생들이 추운 겨울 11월 달에 신의주까지 새까맣게 걸어 가는데 도중에 비행장이 있어서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니까 항공기들이 신의주로 들어갔습니다. 새까맣게 걸어가던 학생들이 비행기 총격을 받으니까 거기서 다 해산되고 말았어요.
신의주 학생운동 사건은 그렇게 실패로 끝났고 사건에 가담했던 많은 학생들이 죽거나 감옥에 가야만 했습니다. 장병혁씨 역시 그 일을 계기로 남쪽으로 먼저 길을 떠나게 됩니다. 뒤이어 그의 부모님과 이미 결혼한 두 누님을 제외한 나머지 5남매 등 온 가족이 기독교 박해를 피해서 장씨가 머물고 있는 서울로 내려갔습니다.
장병혁: 졸업을 하니까 민청의 감시가 심해져서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이남으로 갔죠. 공산 치하에서는 종교 활동이 안 되고 근본적으로 살 수 있는 조건이 안 되니까 떠난 사람이 많죠. 고향 떠난 사람들 가운데 80-90%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많았어요. 어떻게 합니까? 자유롭게 교회를 다닐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아무 연고도 없이 서울에 온 장씨와 가족들은 보따리 장사며 남의 집 뒷일이며 가리지 않고 했습니다.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도 부모님은 자녀들이 학업을 중단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장씨는 그런 부모님 덕분에 서울에서도 학교를 계속 다니며 대학까지 입학했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 전쟁이 터진 것입니다. 온 가족은 다시 짐을 싸서 피난을 떠났습니다.
장병혁: 곧장 대전 대구 부산으로 해서 피난을 갔어요. 그러다 갈 곳이 없는데 모두 입대하자고 해서 학생들을 모아서 입대한 것이 유엔군에 입대하게 되었어요. 카튜사로 가서 미군 육군하고 부대편성이 같이 되어서 7사단에 있었는데 인천 상륙과 함경도 상륙 작전에 참석했습니다. 그해 12월 달에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중부 전선에서 휴전될 때까지 유엔군에서 일하다가 쭉 군대에서 있었죠.
휴전이 되면서 장병혁씨는 군대에 남게 됩니다. 그것도 카튜사에서 배운 영어실력 덕분에 공군에서 통역 장교로 말입니다. 장병혁씨의 통역으로 전투 비행 조종사들은 미군으로부터 첨단 조종 기술을 배웠고 장씨는 1977년 대령으로 제대할 때까지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장씨는 이후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왔고 지금은 메릴랜드 주에 거주하면서 손주들의 재롱을 즐기며 은퇴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장병혁씨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으로써 그리고 고향을 떠나 살아온 실향민으로서 요즘 젊은이들에게 할 말이 많습니다. 민족의 고통이나 통일에 대한 염원보다는 물질적인 욕심에 더 관심이 많은 요즘 젊은이들의 실상이 안타깝기만 하다고 장씨는 말합니다.
장병혁: (젊은이들은) 단일 민족 개념도 없고 공산주의도 개념이 점점 변해가고 생활이 안정이 되니까 돈이 더 중요하고 변해가는 사회를 이 물질주의 사회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