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 보금자리: 북한 원자력공업부 공무원 출신 김대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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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보금자리’ 이 시간에는 북한에서 핵개발 부대에서 근무하다 남한으로 망명한 김대호씨의 이야기를 두 편으로 나눠 그가 북한에서 탈북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 남한에의 17년 생활 이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순서에서는 핵개발 부대 얘기를 들어봅니다.

김대호씨는 59년 생으로 함경남도 단천이 고향입니다. 18세 군입대 이후에는 집을 나와 살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북한 핵개발 사업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김대호: 저는 군복무를 전방에서 했습니다. 1984년 10월 김정일이 핵개발 부대를 조직하라는 지시 내려서 제가 인민무력부 소환을 받고 핵개발 부대로 갔습니다. 황해도 평산에서 우라늄 생산 공장 건설을 하는데 있다가 85년 제대를 해서 영변 핵 단지로 들어갔죠.

김씨는 처음에는 우라늄을 폐기 처리하는 작업반장으로 배치가 됐다가 이후 기동예술선전대에서 작가 겸 연출가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북한이 87년에는 핵개발이 실험적 단계에서 공업화로 이동하는 시점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김대호: 비밀지시문들을 보면 86년도에 북한에 핵개발이 일단은 시험로 가동에 성공을 했습니다. 핵 단지 안의 난방까지 돌렸으니까 그때부터 핵 재처리 시험에 들어가서 그해 12월에 12월 기업소가 생깁니다.

김일성의 교시를 보면 항상 북한 핵개발을 많이 강조를 했습니다. 87년 들어 와서는 김일성이 북한 핵개발에서 가장 큰 성과가 우라늄 농축기를 주최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89년 들어와서 김일성 김정일이 핵 단지 현지 시찰을 하고 상당히 만족을 했습니다. 무기급 핵물질 개발에 성공을 했다고 했거든요. 어느 정도로 만족을 했냐면 핵물질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 기술자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하라고 했습니다. 일본에서 도시바 텔레비를 수입을 해다가 참여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줬습니다. 그리고 간접분야 간부들에게는 북한에서 자체 생산하는 대동강 텔레비를 줬죠.

북한은 핵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고 자신도 89년에 가서는 부직장장으로 승진이 돼 종업원 300명을 지휘하는 위치에 올랐습니다.

김대호: 우라늄을 다 추출하고 나머지 폐기물에서 재활용 시금석을 생산하는 직장이었습니다. 거기에 부직장장으로 있었는데 91년 들어와서는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가장 높은 대우를 받고 있던 핵 기술자들, 미사일 기술자들이 소외층으로 밀려나서 어려워했었죠. 월급도 못타면서 생활도 못할 때죠. 북한에서 710호 라는 핵개발 자금을 전부 그쪽으로 투자해서 핵 기술자, 미사일 기술자들을 북한으로 데려오고 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핵개발 사업은 92년에 가서는 부족한 외화 등으로 더 이상 진척이 어려운 상황에 접어들게 되고 김씨도 외화벌이 사업에 투입됐습니다.

김대호: 러시아 핵 기술자들이 자기들 생활이 어려우니까 플루토늄을 축출하는데 필요한 붉은 수은이라든지 또는 핵탄두를 만드는데 필요한 헬륨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몰래 빼내서 수출을 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북한에서 710호 자금을 그쪽으로 털어 넣어서 밀수입을 하고 그랬죠.

김정일이 710호 자금이 다 고갈 되니까 원자력 공업부 자체로 외화를 벌어서 핵개발에 필요한 자재들을 사들이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직장장 직을 그만 두고 외화벌이 상무로 파견이 됐습니다. 남포지구로 나가서 수산자치대 대장이라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서해에서 나는 수산 외화벌이 자원을 채취해서 이제 핵개발 자금을 확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조개와 방어 등 수산물을 채취한 뒤 팔아 외화벌이를 했지만 북한은 경제상황은 더욱 심각해 졌고 더 이상 핵개발 사업을 추진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고 김대호씨는 말했습니다.

김대호: 북한이 93년 들어와서는 이미 북한 핵개발이 완전히 동결되다시피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클린턴 행정부가 제네바합의 이후에 북한 핵개발이 동결 됐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 1년 전에 북한 핵개발은 완전히 동결 상태에 들어갔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심각했었는가 하면 트럭의 타이어가 전부 닳아서 외화가 없으니까 타이어를 수입을 못했었으니까 그리고 디젤유, 휘발유도 떨어지고 그때 북한에서 전쟁예비 물자인 10호 물자(휘발유)가 있는데 그런 것까지 바닥이 전부 들어 났을 정도로...

플루토늄을 추출하는데 붉은 수은이 들어갑니다. 그 개발에 계속 실패를 하면서 힘들어 했는데 91년부터 밀수입으로 막 들어 왔으니까... 붉은 수은뿐만 아니고 핵분열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것도 수입하고 그런 일들이 있었죠. 붉은 수은을 밀수입하는데 제가 가담한 적이 있습니다.

김대호씨는 당시 사업 수완을 발휘해 외화벌이를 위해 중국에 합영회사를 만들고자 두만강을 넘었고 그곳에서 지체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명의로 중국 당국에 체포령을 의뢰를 했던 겁니다.

김대호: 집사람에게 조금 늦어질 것 같아서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국가 보위부에 들어갔습니다. 중요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하도 집사람이 오래 기다릴 것 같아서... 그때 내용으로는 좀 늦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보낸 편지였는데... 중국에 와서 개방된 현실을 보고 조금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 표현이 조금 섞여 있었죠.

이렇게 해서 중국 공안에서 동북3성에 체포령을 내려 북한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발생 하게 됐고 김씨는 남한으로의 망명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그는 북경주재 남한 대사관에 들어 도움을 요청했고 남한 정부가 파견한 군함을 타고 극비리에 1994년 4월 남한입국을 하게 됐습니다.

김대호: 저는 중국에 올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 하면 쓰러져 가는 조국을 살릴 것인가 하는 충성심에 꽉 차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쪽으로부터 버림당한 것이나 같죠. 그 상황에서 북한으로 나가면 가족까지 다 정치범 수용소로 끌고 들어가기 때문에 차라리 가족을 살리려면 차라리 내가 튀는 것이 나았습니다. 그러면 집사람은 저하고 이혼만 하면 가족은 무사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제가 체포돼서 나가면 가족까지 피해를 보니까... 그 때 체포조로 왔던 사람이 지금 한국에 와 있어요. 한 10년 만에 서울에서 만났는데 그때 저를 잡으면 현장에서 사살해도 좋다는 지시를 받고 중국에 들어 왔더라고요.

워싱턴-이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