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 보금자리‘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전 북한 원자력공업부 공무원 출신으로 지난 94년 남한으로 망명한 탈북자 김대호씨의 이야기입니다.
남한이 보금자리를 진행하는 이진서입니다.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 북한에서 핵개발 부대에서 근무하다 남한으로 망명한 김대호씨의 남한에의 17년 생활 이야기입니다.
김대호씨는 핵개발 자금 등 외화벌이를 위해 중국으로 합영회사 설립문제 때문에 갔다가 그곳에서 지체 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급기야 북한 당국이 탈북을 우려해 그에 대한 체포령을 발동하면서 탈북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김씨는 남한에 도착해서는 북한에 살고 있는 가족을 남한으로 데려가기 위해 사람을 사서 북한에 보내기도 하면서 백방으로 손을 썼습니다.
김대호: 황해도 광산촌으로 추방이 됐더라고요. 부모님 형제들이 있는데 뿔뿔이 다 흩어졌고... 여러번 제가 가족을 데리고 오려고 북한에 사람을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돈을 띠어먹고 집사람이 자살을 했다고 거짓말을 한 겁니다. 그때 저는 충격이 너무 컸습니다. 훗날 알고 보니 사기더라고요.
남한으로 망명한 뒤에는 북한 원자력 공업부에서 일했던 전력 등으로 남한 정부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남한의 원자력 관련 기관에서 일할 것을 제의받았지만 그는 이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대호: 3년 동안은 저에게 그런 요구를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거부를 했었고... 저는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 근처도 가기 싫었고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정부에는 취직을 시켜주겠다 결혼을 해라 했지만 그것을 전부 거부 했습니다.
김대호씨는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에 대한 걱정에 온 생각을 빼앗겨 제대로 일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말합니다. 남한사회에서 정착을 하는데 가장 어려웠던 일은 자신의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급기야 북한에 있는 아내와 두 딸을 그리워하며 시름시름 앓게 됐습니다. 자신을 진찰한 의사가 내린 병명은 귀순 후유증이란 것이었습니다.
김대호: 살이 너무 빠지다 보니까 몸에서 비듬이 많이 떨어지더라고요.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요를 털면 밤새 떨어진 비듬이 하얗게 날아갈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몸에 가지고 있던 병들이 다 없어 졌습니다. 너무 한이 크니까 조금 가다가 허리가 아파서 주저앉고 그리고 코피가 나오고 그런 이상한 증상이 있고 했는데 3년 동안 은둔을 하면서 기도를 하고 과거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동안 병으로부터 자유로워 졌습니다.
3년간 날강냉이만을 먹으면서 은둔생활을 했던 김대호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야 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은둔생활 중 쓴 “가장 슬픈 날의 일기”가 출판이 됐고 2001년에는 자신의 탈북이야기를 전하는 자서전 “그러나 이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북한의 핵개발 야욕을 폭로한 “영변 약산에는 진달래꽃이 피지 않는다”를 세상에 내놓게 됐습니다.
김대호: 북한이 핵개발을 위해서 희생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핵개발의 현장은 너무도 야만적입니다.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살인적인 노동을 강요당하는 겁니다. 방사선 피해, 맹독성 가스 이런 것들과 환경피해,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 그런 것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2004년인가 “영변의 약산에는 진달레 꽃이 피지 않는다”는 책이 있습니다. 북한의 8.15개방부터 핵개발 역사를 소설 형식으로 풀어 놓은 것입니다.
그는 한때 남한의 경기도에 1,000여 평의 대지에 안산각이라는 북한음식을 파는 식당을 차리고 사업도 했습니다.
김대호: 음식점인데 밥장사 보다는 조경이 너무 잘돼있었습니다. 통일을 얘기 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거기서 관련 행사도 하고 했었죠. 냉면, 순대, 갈비도 팔고 했습니다.
그리고 김대호씨는 회원이 1,000여명에 이르는 네트워크, 즉 판매망 회사를 차려서 대표 이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해 판매가 이뤄지는 회사입니다.
김대호: 지금도 그렇지만 제 주변에는 탈북자들이 의외로 없습니다. 제가 올 당시에는 탈북자들도 많지 않았었고요. 그 회사를 차리면서도 부사장 전무 이사진 1000명이 넘는 회원들 중에도 탈북자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전부 남한 사람이었습니다. 탈북자라서 사회정착에 어렵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본인이 어떻게 노력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때는 하루 매출만 3000만원이 넘었습니다. 탈북자라는 신분 때문에 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죠.
김대호씨는 북한을 떠날 때 어린 두 딸에게 새 신발을 사다준다고 약속한 것을 아직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벌거벗은 시의 고백”이란 나체 즉 누드 사진 시집으로 만들어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김대호: 시어로 풀어 낼 수 없는 한이 있잖아요. 그것을 누드로 표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매해 딸들의 생일마다 신발을 산 것이 있습니다. 애들에게 신발 사서 가겠다한 약속이 있어서 생일마다 신발을 사놨는데... 한해 두해 오다 보니 신발 숫자가 많아지잖아요. 그것을 계속 보관 하는 것도 그렇고...그래 제가 임진각에 보면 평화의 다리 철조망이 있는데 그 철조망에 신발을 걸어 놓고 아이들에게 전하지 못하는 그 마음을 걸어 놓고 그 앞에서 제가 표현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제 누드로 표현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는 올해로 14년째 가족과 헤어져 만날 수 없는 상황에 있으면서도 절대 비관은 하지 않습니다. 김대호씨는 지금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자신의 마음을 시로 표현하고 그 시에 자신의 나체 사진을 함께 넣는 인터넷 홈페이지 구성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홈페이지는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인권을 알리는 창구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대호: 지금 저는 고시원에 있습니다. 집을 다 내놨으니까요. 낮에는 홈페이지 편집일을 하고 밤에는 교통비도 마련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하려면 수입이 있어야 하니까 대리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은 마찬가지고 저는 제가 하는 일을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이 작품을 마치면 북한 선교 쪽으로 전념을 하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항상 합니다.
워싱턴-이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