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 보금자리: 쌀, 물, 불이 없는 북한을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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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 정착한 탈북자 삶의 이모저모를 알아보는 ‘남한의 보금자리‘ 순서입니다. 오늘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간 탈북여성 김은성(가명)씨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소개할 탈북여성 김은성씨는 기독교를 알게 된 것이 원인이 돼서 북한을 탈출했고 강제북송과 재탈북 끝에 현재 남한에서 살고 있습니다. 신변안전을 위해 김씨의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올해 68세의 김은성씨는 북한에서는 공업 과학원과 공업 연구소에서 연구사 생활만 40년 가까이 한 엘리트 여성입니다. 그는 원래 중국 태생으로 부모님을 따라 지난 60년대 북한으로 갔습니다.

김은성: 부모 고향이 경상남도입니다. 젊었을 때 고향을 떠났었는데 중국에서 북한을 통해서 가면 더 빠르다고 생각을 하고 그때 북한에 갔는데 그것이 뜻대로 안됐죠. 제가 처음 대학을 졸업하고 북한에 갔을 때는 과학원에 배치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북한에 기술자들이 없고 해서 최고 대우를 받았죠. 그래 살았는데 저는 기독교인이었는데 북한에는 교회도 없고 해서 곤란을 겪다가 36년 있다가 다시 중국으로 갔던 것이죠.

김씨가 기독교와 깊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87년 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에 여행을 갔다가 한 목사의 설교 테이프를 듣고서 거짓말처럼 고질병이 낫게 된 것과 그로부터 10년 뒤 중풍으로 반실불수가 됐지만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며 완치가 되면서 종교에 빠져들게 됐습니다. 하지만 북한당국이 금지하는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에 더 이상 북한에서는 살수 없었습니다.

김은성: 목사님 녹음 설교를 듣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제가 신경이 예민해서 항상 머리가 아팠는데 나았죠. 30여년을 앓던 두통을 치유 받고 너무나 감사해서 우리 친척들을 전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녹음테이프를 북한 들어갈 때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북한은 95년이 제일 힘들었습니다. 그때 나도 먹고 살기 위해서 집을 비우고 장사를 나갔는데 도둑을 맞았습니다. 그 도둑놈이 성경책을 도둑질해서 보위부에 그것을 갖다 줬습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 책이 우리 집에서 나왔으니까 잡히면 죽는다고 집에 돌아가지 말라고 귀뜸을 해줘서 그 길로 중국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결국 아들까지 잃게 됩니다.

김은성: 아들 하나 밖에는 없었는데 같이 탈북 해서 아들이 신학교에 다니면서 중국에서 북한 사역을 하다가 북송을 당했습니다. 나도 같이 북송을 당했는데 아들은 북한 감옥에서 순교당하고 저는 다시 탈북해서 중국에 있다가 한국에 왔습니다.

김씨는 북한에서 40년 가까이 살긴 했지만 중국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대학을 다녔기에 탈북해 중국에서 살 법도 했지만 중국에서 만난 남한의 기독교인들의 얘기를 듣고 생활안정이 보장되는 남한으로 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김은성: 여기서 간증도 하러 다니고 아침에 와서 예배보고 찬송 부르고 성경보고 그런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내가 믿음생활 잘하고 북한 선교 잘하고 하면 되지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김씨는 남한의 기독교인들이 인도적 차원에서 대북지원 사업을 펼치고 직접 간접으로 북한선교를 위해 힘쓰고 있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북한의 일반주민들에게는 전달되지 않는 현실이 너무도 가슴 아프다고 말했습니다.

김은성: 같은 동족인데 북한은 찢어지게 못살고 남한은 잘살면서 북한의 실정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픕니다. 북한경제는 누가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 없이 연쇄적으로 모두 문제이지요. 북한은 어느 한 사람이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김정일 정권이 바뀌어야 한단 말입니다. 북한 사람들은 쌀, 불, 물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한 기본이 없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죠.

낯선 남한생활은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여러 사람들이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김씨는 때때로 남한사람들의 생활을 보면서 좀 더 일찍 남한생활을 시작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김은성: 여기 교회 다니는 목사님하고 같이 일하시는 분들이 먼 곳은 차를 태워주고 하니까 어렵긴 하지만 불편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모두 차를 직접 몰고 다니고 하기 때문에 내가 일찍이 운전을 배웠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있죠. 여기 사람들 제 나이면 모두 차를 직접 몰고 다니거든요 그런 것을 볼 때 부러움이 좀 있죠.

환갑을 한참 지난 나이에 그것도 피붙이 하나 없이 남한에서 살고 있지만 큰 어려움은 없다고 김씨는 말합니다.

김은성: 국가에서 기초생활 보장자로 돈을 줍니다. 65세만 지나면 돈을 주죠. 저는 탈북 했고 혼자이니까 돈을 주잖아요. 한 달에 59만 원 정도 주고 차비로 해서 좀 주는 것을 보태서 60만원 조금 넘게 받습니다. 옷 같은 것은 도와주는 분들이 주는 것을 입고 안 쓰고 아껴서 북한에도 300만원을 보냈습니다.

항상 속에 불이 나는지 시원한 것을 유난히 좋아해 국수 종류를 자주 먹는다는 김씨는 북한에서는 먹는 문제가 사는데 가장 중요했었지만 남한에서의 여생은 주위를 돌아보면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김은성: 저는 아직 개인을 위해서 살아보질 못했습니다. 내 마음에 우리 아들이 복음을 위해 순교 당했기 때문에 우리 아들이 하지 못한 것을 대신 한다는 마음에 아직도 북한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눈물로 기도하고 그 사람들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은 조금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워싱턴-이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