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 보금자리: 북한인권을 위해 뛰는 탈북자들 이민복, 김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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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기획 '남한의 보금자리' 2007년 들어 첫 번째인 이 시간에는 외부세계의 소식을 풍선에 매달아 북한으로 날려 보내는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탈북자 이민복씨와 요덕 수용소의 노래를 가무극으로 엮어 남한과 미국에서 공연하는데 있어 안무를 맡았던 탈북여성 김영순 할머니의 이야기를 묶어서 전해드립니다.

먼저 탈북자 이민복씨는 북한 농업과학원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중 숙청당해 벌목공으로 있을 당시인 지난 1994년 모스크바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에서 난민지위를 인정받아 95년 남한에 입국했습니다. 그는 이제 남한 생활이 12년째가 됩니다.

이민복씨는 대략 3년 전부터 대형 기구 모양의 풍선에 기독교 성경구절과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삐라를 매달아 북한으로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전단지 한 장을 매달아 보내던 것을 이제는 1kg에서 10kg에 이르는 무게의 풍선 날리는 기술을 개발해서 삐라는 물론 북한주민들이 생활에 긴요하게 사용할 수 있는 비닐봉지와 장갑, 스타킹 등도 풍선에 매달아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이민복: 풍선이 북한 주민들을 깨우는데 좋은 수단이라는 것을 깨닫고 여러 단체가 동참하는 것에 감사하고 그들의 힘에 의해서 북한 당국도 반응을 했다고 믿고 싶습니다. 우리는 북한 당국을 밉다고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서 북한 주민이 너무 불쌍하다고요. 세상에 가장 불쌍한 주민은 북한 주민이죠. 제대로 말을 하나, 먹기를 하나, 가기를 하나. 암흑의 땅에 이런 희망의 소식, 구원의 소식을 보낸다는 것이 저는 가장 가슴 뿌듯하고 이것이 옳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서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고 싶어 하는 것에 감사합니다.

현재는 남한에서는 크게 두 단체에서 북한으로 풍선을 날리고 있습니다. 북한정권 교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탈북자 인권단체인 ‘북한민주화 운동본부,’ 그리고 이민복씨가 주도 하면서 북한에 기독교 복음 전파를 위주로 하는 ‘새날 선교회’가 있습니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교회에서 이민복씨와 뜻을 함께 하면서 3.8선 주변 지역에서 북풍이 불 때면 어김없이 풍선을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풍선 날리기는 북한 당국의 반응도 이끌어 냈습니다.

지난해 8월에는 북측이 판문점 연락장교 접촉을 통해 북한 체제를 비방하는 전단 살포를 민간단체에서 하고 있다며 이 같은 활동을 중지시켜 줄 것을 남측에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민복씨는 현재 남한에서 북한인권개선을 위한 단체인 북한구원운동 상임집행 위원이고, 기독사회책임에서 상임집행위원, 북한인권시민연합 자문위원, 기독 북한연합 고문 등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민복씨는 북한주민들에게 외부 소식을 전하는 방법으로 풍선 날리기 운동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민복: 북한 생활과 저는 항상 비교를 합니다. 남한에 있는 탈북자들은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남한입국 탈북자 생활이 어렵다는 말도 듣지만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저는 농업전문가이기 때문에 정부기관에서 여러 번 찾았습니다. 월 200만원이면 달러로 2천 달러쯤 되는데 가지 않고 내가 자유로운 세상에 왜 왔는가, 하고 싶은 일, 자유의 의지를 가지고 뜻을 세우고 나간다는 자체가 나는 잘 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2007년 새해를 맞아 북녘동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잃지 말아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민복: 북한은 암흑의 땅이요, 거대한 감옥입니다. 저는 북한 주민들이 불쌍해서, 못 먹는 것 때문에 불쌍하기보다 영의 굶주림이 더 심각한 겁니다. 사람은 짐승과 틀리죠. 그런 의미에서 암흑에 땅에 살지만 반드시 희망이 있다는 것, 어둠 뒤에는 새벽이 찾아오는 것처럼 희망을 가지라는 것, 그것이 먼 데 있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멀게 느껴졌지만 현 정세로 봐서 이것이 빨리 올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이 시간에 소개할 또 다른 한 명은 북한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부인 성혜림에 대해 말을 전했다는 이유로 요덕 정치범수용소에서 8년간 수감생활을 한 김영순 할머니입니다. 1937년에 태어난 김영순 할머니는 북한에서 평양종합예술전문학교 1기생으로 무용가 최승희씨의 가르침도 받았으며 조선인민군 협주단에서 무대생활만 13년을 했습니다. 또 제대 후에는 외국 여행자 상점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요덕 수용소에서 나온 뒤 2004년 불구가 된 아들과 함께 남한에 입국했으며, 이후 요덕 수용소의 참상을 알리는 작품의 안무가로 활동했습니다.

김영순: 요덕 스토리 가지고 연습하고 훈련하고 공연 다니고...북한의 인권상황을 전 세계적으로, 그래도 미국에 가서 알렸고, 한마디 강의 보다 작품으로 사람들을 울리고 한 것이 좋았습니다. 보다 더 인권 활동을 심도 있게 해서 북한이 개혁.개방도 하고 제대로 살아가길...국민들이 굶어 죽지 않고 살기를 기원하는 마음입니다.

김영순 할머니는 요덕 이야기 가무극에서는 수용소에 잡혀온 한 여성과 보위원이 사랑을 하게 되고 자식을 낳는 것으로 설정 돼 있지만 이러한 것은 북한의 수용소 실상과는 다르며 외부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극화시켰다는 점도 지적을 했습니다.

김영순: 작품은 감독이 쓰고 저희들이 고증에 의해 예술적으로 부각시켜서 사랑과 용서를 넣었으니까. 북한에서 요덕 수용소의 수감자들이 보위원과 좋아하고 그런 것이 사실 없거든요. 거기서 생활하는 것이 짐승하고 같은데 사랑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또 보위원들이 죄인들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도 없고 여건이 돼 있지 않고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술 작품이니까.

이제 남한 생활이 3년이 되는 김영순 할머니는 매주 한 번씩 탈북자들의 모임에 참석해 무용으로 몸도 풀면서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 북한의 수용소 참상을 알리고 북한 민주화를 위해 일하면서 여생을 마치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김영순: 저의 엄마 아빠도 거기서 굶어 죽고, 9살짜리 아들도 물에 빠져 죽고. 거기도 애가 죽는 장면도 나오잖아요. 남편도 영원히 못 나오는 수용소 가서 현재까지 생사 여부를 모르고. 아들 하나 탈북하려다가 총살당하고, 하나 나온 것 마저 너무 고문을 당해서 폐인이 된 상태고. 이런 것을 다 생각을 하면 원한과 원한에 사무쳐서 피눈물이 거꾸로 서지만 그래도 그런 저에게 인생이 정말 참혹한, 정말 지옥 같은 밤이 있었기에 오늘 내가 대한민국을 선택할 수 있었다는 견지에서 생각을 하면 용서가 되네요.

그리고 항상 요덕의 정신으로 살면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살고 있다는 김영순 할머니는 북한동포들에게 새해 인사를 전합니다.

김영순: 북한은 지난 97년보다 어렵다니까, 정말 같은 겨레의 심정으로 북한 동포들이 이 추위에 어떻게 떨고 굶주리고 있는가 하고 생각하면 너무 가슴 아픕니다. 정말 용기를 잃지 말고 모두 투신해서, 어떻게든 생명을 부지해서 좋은 날을 기대 하면서 열심히 살기를 기원하죠.

워싱턴-이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