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기획 '남한의 보금자리' 이 시간에는 지난 2001년 입국해 남한생활 6년이 된 북한 민주화운동본부 사무국장 박광일씨의 이야기입니다.
탈북자 박광일씨는 지난 1974년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태어났고, 북한에서는 ‘김형직 사범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계층의 사람입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1년 반 동안 고향에 있는 성천강 고등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교사였습니다.
북한에서 교원 가정에서 자랐고 자신 역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탈북을 하게 된 것은 98년 ‘모래시계’라는 제목의 남한 비디오테이프를 친구들과 돌려 본 것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당시 북한에 계속 있었다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박광일: 그때 김정일의 방침이 떨어졌었습니다. 북한에서 황색소탕 작전이라고 자본주의 문화 유포, 비사회주의 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습니다. 남한 비디오를 본다든가, 방송을 듣는 다든가, 남보다 좀 부유하게 산다든가 하면 조사 대상이 됐습니다. 특히 남한 비디오나 일본 영화, 남한 라디오를 듣는 사람은 전부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고 그럴 때입니다. 제가 걸린 것이 아니라 3자에서 걸렸어요. 그때는 보위부에 걸린 것이 아니라 비사회주의 구루빠라고, 특별히 중앙당 안전 보위부와 합동으로 조사단이 전국에 내려가 있었습니다.
남쪽 비디오를 봤다는 이유 하나로 갑자기 인생의 방향이 달라진 박 씨는 현재 남한에서 생활하며 자신에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를 가끔씩 생각해 봅니다.
박광일: 두 가지 생각입니다. 그 사회에 대한 원망이랄까... 그런 생각에 내 인생이 참 서글프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는 내가 그때 사건으로 여기까지 왔으니까 세상을 알고, 내가 북한 사회에 대해 너무 잘 알게 됐고, 북한 주민들을 위해서 부족하지만 이런 일을 하 수 있다는 것이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당시에 고생은 됐지만... 긍정적인 생각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박광일씨는 지난 2001년 3월 남한에 입국해 다음해 신학대학에 입학을 했습니다. 신학공부를 마친 뒤에는 같은 탈북자 출신으로 현재 북한민주화 운동본부 대표로 있는 박상학씨를 만나면서 북한인권운동에 동참을 했습니다. 그가 처음 맡았던 일은 단체에서 발행하는 월간 신문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박광일: 저희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재 북한의 상황들, 북한주민들이 처해 있는 상황들, 즉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는 북한주민들의 실질적 상황, 북한주민들의 의식, 김정일 정권에 대한 인식을 조사 분석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또 북한정부의 국민에 대한 탄압을 어떤 방법으로 계속 진행하는가를 조사 분석합니다. 그리고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가와 강제북송 사례를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남한정부의 대북관과 정부의 남북대화 속에서 대북 협력문제, 그리고 남한입국 탈북자들은 어떤 대우를 받고 삶을 살고 있는가? 등 여러 가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올해부터 북한민주화운동본부 사무국장일을 맡아 하게 된 박광일씨는 더욱 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북한으로 보내는 대북 전단지, 즉 삐라를 풍선에 매달아 보내는 일은 물론 단체의 크고 작은 살림을 맡아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박씨는 남한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남한출신 여성과 결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장인, 장모의 반대가 있기도 했지만 지금은 처갓집에서 무척 좋아하고 있다며 북한인권 운동을 하느라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내에게 미안함을 느낀다는 심정도 고백했습니다.
박광일: 저를 이해해 주고 인권운동을 할 수 있도록 밀어주고 해주는 집사람이 너무 고맙죠. 제가 뭐 내세울 것이 있습니까? 또 저녁에 늦게 들어가서 피곤하면 그냥 자고 아침에 나오고, 거의 집 생활을 돌보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도는데 그것을 이해해 주고, 지지해 주고, 남편을 아껴주고,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고, 애까지 키운다는 것이... 다른 남한 여자들도 그렇게 한다면 남한 여자 존경할 마음이 있습니다.
박광일씨는 자신이 탈북을 하고 남한여성을 만나 결혼을 한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살면서 수없이 많은 일들을 계획하고 그 뜻을 이루려고 노력해 보지만 때로는 모든 것이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는 것입니다.
박광일: 저는 남한 여자이니까, 교회에서 중매를 해서 알게 됐는데 남한여자에 대한 인식도 없었고 안 살려고 제가 많이 피해 다녔습니다. 그때 집사람은 제가 탈북자라는 것도 모르고 처음 저를 만났던 것입니다. 첫 만남 후 탈북자라는 것을 알게 했는데 제가 피해 다니니까 여자로서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흥미도 가지고 했답니다. 그런데 집사람이 나중에는 기도를 하면서 저 사람하고 꼭 살아야 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더랍니다. 결정적으로 교회 담임 목사님이 합의점을 이끌어 낸 것이죠.
박광일씨는 남한에서 생활한 6년을 돌아보면서 나름대로 자신을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북한에서 자신이 가르쳤던 28명의 아이들에게 훗날 다시 만나기를 원한다며 제자들의 건강을 기원했습니다.
박광일: 저는 제자들이 저에게 배신했다고 말해도 제자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그들이 저를 배신자라고 침을 뱉을지라도 나중에 통일이 되고, 북한 땅에도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실현될 수 있다면, 그때 다시 우리 제자들을 만날 수 있다면 이 선생님은 그래도 너희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민족과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최선을 다했다...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아울러 말하고 싶은 것은 부디 그 땅에서 잘 견뎌서 죽지 말고 몸을 보존해서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고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워싱턴-이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