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 보금자리: 탈북자 못 먹어서 체력이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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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기획 ‘남한이 보금자리‘ 지난번 시간에선 탈북자 김금희씨의 북한내 생활과 탈북 후 중국과 몽골에서 겪은 얘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순서로 2003년 남한에 도착해서부터 현재까지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신변안전상 김금희씨는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남한 땅에 도착했을 때의 심정을 말씀해 주세요.

김금희: 우리 조는 8명이었는데 대한민국 인천공항에 들어오니까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어떻게 여길 왔을까...중국에 있을 때는 진짜 새라면 나라가고 싶은데 이런 생각이 간절하게 들죠. 국정원에서 사람들이 마중을 나오더라고요. 남한 사람들을 처음 봤는데 양복을 입고 마중 나와서 잘 대해 주고 하니까 좋네, 이런 느낌도 받았죠. 보는 순간 편하게 말도 하니까 무서운 생각은 없었습니다.

공항에 마중 나왔던 남한 사람의 첫말이 뭐였나요?

김금희: 잘 오셨습니다. 고생 많이 했죠. 그러더라고요. 그말에 우리 8명이 다 울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 말도 안하고 큰 차에 태워서 국정원에 들어갔죠. 오자마자 발재고, 키재고 해서 옷을 주고 화장품도 주고 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화장품도 한 번도 못써 봤는데 ... 너무 감사했죠.

남한에서 처음 했던 일이 핸드폰 , 그러니까 손전화기를 만드는 공장이라고 했는데 어땠나요?

김금희: 액정검사는 시간이 너무 오래였습니다. 북한에서는 나도 담배공장에서 일했는데 12시간씩 일을 하니까 정말 힘들었습니다. 플라스틱을 한판씩 기계로 찍어 내는데 조금만 졸아도 기계에 손도 짤리죠. 야간 일을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은 좀 특이하게 노는 사람도 있었지만 문제는 없었습니다. 다 일할 때는 말도 없고 했죠.

그 공장에서는 어떻게 일하게 됐나요?

김금희: 직업소개소에서 모집광고가 나서 이력서 내서 들어갔죠. 돈은 잔업을 하면 110만원 받았고 8개월 정도 일했습니다.

첫 월급을 받아서는 뭘 했나요?

김금희: 저는 아까워서 안 썼습니다. 통장에 돈이 들어 왔을 때 내가 돈 쓰기는 쉽지만 이만큼 벌었구나 하면서 놔두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새벽 6시 나가서 11시에 들어 왔습니다. 버스도 한 시간 반씩 타고 다녔으니까 돈을 쓸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은 왜 그만 두셨어요?

김금희: 그때는 몸이 아팠습니다. 심장이 나빠서 오래 서있으면 다리가 붓고 합니다. 거기 나가니까 몸도 붓고 해서 마지막에는 다리 관절이 아파서 그만 뒀습니다.

심장이 나빠도 다리가 붓나보죠?

김금희: 심장이 온 몸에 피를 전달하는데 기능을 못하니까 머리가 아프고 발끝까지 붓고 손발이 땡땡 붓죠. 내가 25세 때 중국 식당에서 일할 때 한족이 우리를 얼마나 못살게 구는지 쪼금만 잘못하면 말로 안하고 때리고 구둣발로 찼는데 심장을 바로 맞았습니다. 그때부터 아팠는데 지금 생각하면 염증이 생겼는데 돈이 없어서 주사를 못 맞았습니다. 이제는 만성이 됐죠.

액정검사 하는 데서 나와서 그 다음에 한일은 뭡니까?

김금희: 여관청소를 했습니다. 북한 아줌마하고 둘이서 한 달에 90만원을 받고 청소를 했습니다. 화장실 청소하고 손님이 나가면 새 이불을 놓고 여관 청소도 식당일처럼 힘들어요. 둘이 손발이 맞으니까 그냥 했죠. 그것도 9시부터 9시까지 12시간 합니다. 점심시간은 1시간 주고요. 그것은 한 3개월 하고 그만 뒀죠. 힘들어서요.

남한 돈 90만원이라면 미국돈으로는 1천 달러 가량 되는 셈인데요, 그러니까 돈도 좋지만 결국 체력이 안 따라주니까 일을 할 수가 없게 된 거네요.

김금희: 북한 사람들이 하자는 의욕은 많은데 체력이 딸립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끗하게 빨리 잘하는데 육체가 허용을 안 합니다. 나도 일하면 하는데 오래 하면 온 몸이 안 좋거든요. 어릴 때부터 잘 먹고 해야 하는데 풀만 먹고 자랐으니까... 지금도 그럽니다. 나도 자식을 키우지만 어릴 때 잘 먹여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어릴 때 잘 먹어야지 남한에 와서 잘 먹어도 기운을 못 쓰잖아요. 마음뿐이지 하질 못해요.

남한의 탈북자들이 돈 버는 재미로 한다고 힘들 줄 모르고 일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본인도 그랬나요?

김금희: 그렇죠. 제가 노력한 만큼 버니가 좋죠. 북한에 있을 때는 힘들어도 월급이 없습니다. 내가 일하고 북한에서 받은 돈으로는 쌀 한 키로도 못 사먹습니다. 여기서는 조금이라도 하면 돈을 받으니까 이것이 내 돈이구나 노력해서 벌 수가 있구나 이런 감이 들죠. 북한에 세금이 없다고 하지만 이름을 바꿔서 인민복권 20원... 그것이 세금이라고요.

중국에서 낳은 아이가 있다고 했는데 언제 남한으로 불렀나요?

김금희: 작년에 데려 왔습니다. 2년 만에 데려왔죠. 국적이 없어서 여기서 돈을 벌어서 보내서 중국에서 국적을 해서 내가 초청을 해서 데려 왔죠. 호적은 아빠에게 하고 초청은 내가 해서 데리고 내가 남한국적을 취득했기 때문에 아이 주민번호가 나옵니다. 그러면 초청을 할 수 있거든요.

조선족 남편 분은 지금 남한에서 뭘 하세요?

김금희: 지금 중국식당 요리사합니다. 배운 것이 그것이니까 여기 와서 한 1년 보조 하다가 이제는 주방장을 하려고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요.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을 해야죠. 아이를 공부시키려면 해야죠. 여기 오니까 조그마한 집도 있고 일도 있고 하니까 안 되는 것도 노력하려는 모습도 보이고 합니다.

보내주신 전자우편에서 대학공부를 하신다고 했는데 통신대학을 택한 이유는 뭔가요?

김금희: 일하면서 공부하려고 실은 거기에 들어갔습니다. 원래는 애가 있으니까 맞벌이를 해야 하는데 그냥 대학 공부만 하면 일을 못 하잖아요 그래서 일하면서 공부를 하려고 통신대학을 갔습니다.

앞으로의 희망이 있다면?

김금희: 대학을 졸업하고 영어 학원 강사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있죠.

워싱턴-이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