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 보금자리: 국군포로 북한에서 최하위 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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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기획 ‘남한의 보금자리’ 오늘 소개할 탈북여성은 최근 남한에서 남한에 입국한 국군포로의 가족에게도 보상금을 준다는 보도를 봤다면서 기자에게 이메일 즉 전자우편으로 자신의 사연을 보내왔습니다.

김씨의 이야기는 두 번에 걸쳐 그가 탈북해서 남한에 들어오기까지의 이야기 그리고 남한에서의 현재 생활로 나눠 전해드리겠습니다. 신변안전상 김금희씨는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북한에서의 국군포로와 그 가족들의 실제 생활은 어떤가요?

김금희: 국군포로들의 실상이라는 것이 한심하죠. 국군포로라고 하면 진짜 최하층, 상놈들이죠. 탄광에서 일하고 자식들은 군대도 못가고 전부 탄광에서 일하고 탄광일도 남이 8시간 일하면 일도 더 잘해야지 조금만 못하면 성분이 나빠서 일을 못한다고 그렇게 평가를 합니다.

저희 둘째 오빠, 넷째 오빠가 지금도 탄광일을 하지만 여기서 내가 조금 돈을 보내줘서 밥이라도 먹고 살지만 사회적으로는 최하층입니다. 지금도 아버지가 남한 출신이기 때문에 피가 그쪽이니까 피 따라 간다 남한으로 뛴다고 감시하고 그런 것이 많아요.

다른 가족들의 어떻게 됐습니까?

김금희: 우리 언니가 중국에 팔려갔다가 자식이 있고 남편이 있으니까... 3-4월에 넘어 오다가 한 장 두만강 물이 불었을 때라 물에 빠져 죽었어요. 엄마는 굶어 죽고 아버지도 수용소에 들어가 개처럼 맞아죽고 큰 오빠도 탄광일을 하면서 먹지 못해서 죽고.

탈북했을 98년 당시의 북한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김금희: 그때는 대아사 나내, 국민들이 300만이상이 굶어죽고 95년부터 2000년도 많이 죽었습니다. 눈을 뜨면 한동네에서 몇 명씩 나가고 관을 할 나무가 없었습니다. 산에 가서 많이 찍어서 ...관에 묻지 못하면 거적때기에 죄인들처럼 묻었을 정도입니다. 불 땔 나무 집 앞에 목재를 갖다 놓은 것도 캐서 관을 짜고 그랬습니다. 그때 전염병을 앓았는데 파라티푸스라고 열병인데 열이 나면 배에 구멍이 나서 다 죽습니다. 석 달 동안 앓고 일어났는데...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뭡니까?

김금희: 속에 열이 나니까 찬 것이 먹고 싶지만 그 열병에는 찬 것을 먹으면 죽어요. 맹물을 먹어도 토하니까... 그런데 제일 먹고 싶었던 것이 시원한 독안이 김칫국이 제일 먹고 싶었습니다. 옆집에는 그마나 먹고 사는 집이라서 김치가 있었어요. 불쌍하다고 김칫국물을 엄마가 가서 한 사발 얻어 왔어요. 좀 먹자고 그래서 한 사발 얻어 온 것을 먹었는데 얼마나 시원하고 좋은지 세상에 김치도 없어서 그랬는데 여기 아이들은 벼가 어떻게 자라는지도 모르고, 꽁깍지가 뭔지도 모르고... 난 그런데서 살았으니까 이밥에 김치만 먹어도 감사하죠.

먹고 살기 위해서 북한을 탈출 했다고 했는데 중국에서는 어땠나요?

김금희: 넘어가서는 언어가 다르니까 힘들었죠. 처음에는 팔려가서 한족이 운영하는 식당일을 했는데 거기서 방바닥도 청소를 하고, 설거지 하다가 당시 북한 사람들이 많이 탈북을 하니까 호구조사를 중국에서 쎄게 했습니다. 로반이(사장이) 자기는 호구를 못내주니까 나보다 4살 어린 21살짜리 하고 둘이를 ... 지금 생각하니까 북경에서 할빈으로 해서 할빈에서 길림으로 돌아 돌아서 갔는데 각밥 한 그릇 사주고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우릴 버리는 줄 몰랐죠. 걸리면 벌금을 내니까 우리가 국적이 없으니까 길림역에 우릴 버린 거죠.

국적이 없어서 길림역에 버렸다고 했는데 그전에는 팔려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김금희: 다 팔려왔죠. 중국 연변에는 조선족이 사는데 조선말도 하고 중국말도 하니까 한족들에게 북한 사람들을 중국에 들어가면 한족에게 팔아요. 지금도 인신매매를 한다고 하잖아요. 주로 여자들을 중국 돈 3000원 -5000원에 팝니다. 말도 모르고 길도 모르고 하니까 거의 팔려가서 살죠. 내가오니까 다른 북한 여자가 있었는데 북경에 있는 한족식당에 팔려갔어요. 거기서 일주일 만에 그 주인이 길림역에 버리더라고요. 팔려서 시집가는 것도 많고 많습니다. 조선족들이 돈 벌려고 그런 짓을 하더라고요.

중국에서 살면서 제일 바랬던 것은 뭡니까?

김금희: 막 떠돌아 생활을 하니까 집이 없잖아요. 중국은 추운데 집이 없어서 정말 춥고, 힘들때 아랫목에서 몸이라도 녹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잖아요. 그럴 때는 제집이 있으면 불 떼는 온돌방이 있으면 불을 떼서 몸을 녹이면 얼마나 좋을까...식당일을 하다가 공안들이 신분증 검열을 하면 또 거기서 일을 못합니다. 거기서 나오면 한참 또 일자리를 찾자면 먹고, 자고 하는 것도 3원씩 내고 있는데 힘들죠. 어디 갈때가 없어서 정말 집이 필요하죠. 막 추워서 바깥에서 많이 떨고 그런 적이 많죠.

바깥에서 떨었다는 것은 돈이 없어서 그냥 길에서 잤다는 얘긴가요?

김금희: 예, 여관에 들어가자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없어서 길거리에 쪼그리고 앉아있고 2-3시까지 잠이 안와요. 또 5-6시 새벽되면 인력시장에 가서 일자리 찾고 하는데 신분증이 있는가 하는데 집에 놔두고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가서 일을 해도 도중에 신분증을 내놓으라고 하면 황당하죠.

자살도 많이 생각하셨다고 했는데요?

김금희: 그때는 집이 없으니까 애를 데리고 저기 농촌에 한국으로 돈벌러간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런 빈집이 있어서 볏짚을 떼면서있었습니다. 애 아빠는 장춘에 일한다고 가고 그런데 남편에 한곳에 오래 있지를 못해요. 한 달 있다가 뛰쳐나오고 벌어 놓은 돈 다 까먹고 애를 키우려면 젓이 안 나와서요. 우유를 사먹이고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많이 속상했죠. 애는 있지 중국에서는 쌀은 흔하니까 맨 씨레기국으로 먹고 있었죠. 중국에서도 힘들게 살았죠.

몽골을 통해 남한에 입국하셨는데 국경 넘는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김금희: 국경을 넘는데 초저녁 5시부터 내몽골 초원을 걸었는데 딱 12시간을 걸었습니다. 다음 새벽 5시니까... 국경에 콘크리트 기둥에 전기철조망을 했는데 너무 높았습니다. 그래서 그 밑으로 땅을 파서 철조망에 머리 하나 빠질 만큼 파서 세 명이서 몽골로 빠져 나왔죠.

전기철조망에서 큰일 날뻔했네요.

김금희: 전기를 투하하는 시간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계속 공안이 순찰을 하는데 몽골 군인들이 러시아 복장입니다. 우리에게 자동총을 겨누는 겁니다. 손을 뒤로 묶고 눈을 가리고 부대로 이송하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때리고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주라고 하니까 자기들이 먹는 우유하고 빵하고 해서 죽 같은 것을 주더라고요. 다시 거기서 1주일 몽골 변방 감옥에 있다가 울란바트르 몽골 수도로 가서 다시 한 달만에 몽골에서 대한민국으로 왔죠.

울란바트르에서는 어떻게 한국으로 간겁니까?

김금희: 울란바트르에 있으면 몽골 변방대에서 한국 대사관으로 연계를 합니다. 탈북자들이 왔다고, 한국 대사관에서 사람이 왔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조서를 씁니다. 자기 소개서를 쓰고 진짜 북한 사람인가 확인을 합니다. 검사를 하고 나서 여권 만들어서 비행기를 태워서 대한민국으로 보내죠. 그것이 2003년입니다.

워싱턴-이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