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세상] 나의 살던 고향, 대성동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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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북한을 중심으로 미국과 한국 등 국제사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통해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를 엿보고 흐름과 의미를 살펴보는 노정민의 <라디오 세상> 시간입니다.

-미, 한국전 미군 유해 발굴 167구

지난 7월 27일은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을 맺은 날입니다.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던 남과 북이 전쟁을 중단한 지 58년의 세월이 흘렀는데요, 미국 워싱턴 곳곳에서는 한국전 참전용사에게 감사와 존경의 뜻을 전하고 희생자들의 헌신을 추모하는 각종 행사가 열렸습니다. 한편, 미국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와 실종자 담당국의 카리 파커(Carie Parker) 공보 담당관이 29일 자유아시아방송(RFA)에 밝힌 내용에 따르면 지금까지 한국 전쟁에서 숨진 미군 유해 중 167구의 신원이 확인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167 identified since 1982 is current.)

올해에만 미군 유해 22구의 신원이 추가로 확인된 것인데요, 지금도 유해의 신원확인 작업이 계속되고 있지만 북한 땅에 묻힌 8천여 구에 가까운 미군 유해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북한은 미국의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주 주지사를 통해 한국전쟁에서 숨진 미군 병사의 유해를 발견했고 이를 송환하는데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는데요, 미국 국방부는 이후 미군 유해의 송환과 관련해 아직 북한과 큰 진전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20구의 유해가 발견돼 7구의 신원이 밝혀졌다고 하네요.

노정민의 <라디오 세상> 오늘은 정전협정 58주년을 맞아 새롭게 꾸며봤습니다. <라디오 세상>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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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동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구정연( 오른쪽), 구 슬 자매(왼쪽). (RFA PHOTO/노정민)

한반도의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북한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남측 마을, ‘대성동’ 마을을 아십니까? 이곳은 공동경비구역 내에 있는 특수한 마을인데요, ‘대성동’ 마을은 1953년 ‘남북 비무장지대에 각각 마을 1곳씩 둔다.’라는 정전협정의 합의에 따라 생긴 마을입니다.

수백 미터 앞에는 북한군 초소가 있고, 항상 한반도의 분단 현실과 군사적 긴장감을 느끼는 ‘대성동’이지만 자연이 살아 있고, 추억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마을이기도 한데요, 오늘 <라디오 세상>에는 대성동 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고 생활했던 자매 두 분을 <라디오 세상>에 초대했습니다. 현재 22살과 20살인 두 학생은 자신을 꿈을 이루기 위해 현재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환한 표정의 학생 두 분이 이 자리에 나와 주셨는데요,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구정연] 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구정연이고요, 저는 언니입니다.

[구슬] 네 저는 구 슬이라고 합니다. 저는 동생입니다.

두 분이 ‘대성동’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들었는데, 그곳에서 몇 년 정도 살았나요?

[구정연] 저는 18년 정도 살았고요, [구슬] 저는 15년 정도 살았습니다.

대성동 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는 것을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또 북한과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생활한 것은 신기한 경험일 수 있겠는데, 지금부터 그곳의 이야기를 함께 나눠보죠. 지금도 가끔 대성도 마을에 들어간다고요?

[구정연] 네 제가 그 동네 안에는 고등학교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교육 때문에 가족과 함께 큰 도시로 이사했고요, 그 이후에는 설날이나 명절 때 그곳의 큰 집과 할머니가 계셔서 일 년에 두 번씩 방문했습니다.

그럼 아직 대성동 주민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거죠? (그렇죠)

우선 대성동 마을과 그곳의 생활을 전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나요?

[구정연] 우선 저희는 어렸을 때부터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위험하거나 무섭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큰 사회를 나와서 그곳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아, 내가 유년시절을 특별하고 희귀한 곳에서 살았다’는 느낌이 있어요.

[구슬] 저도 언니처럼 특별하게 무섭다고 느낀 적은 없는데, 처음 친구들이나 처음 본 사람과 대성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신기해하는 것을 보면 약간 뿌듯한 느낌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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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동 마을의 주민임을 증명하는 신분증, 유엔사령부에서 발행한 신분증이 있어야 마을로 출입할 수 있다. (RFA PHOTO/노정민)

대성동 마을은 남북분단의 현실 때문에 항상 긴장감이 흐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실제로 그곳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구정연] 다른 동네와 다를 것 없고, 북한 사람들이 앞에 있고, 북한 군인들이 저희 동네 앞에서 초소를 지키고 있어요. 그럼에도 어린이들이 밖에서 노는 것을 부모님께서 싫어한다거나 통제를 하는 것이 전혀 없고요, 오히려 자유로워요.

[구슬] 거의 다 벼농사나 고추 농사를 지으시고, 돼지나 사슴, 가축도 기르시고요, 저희 친척분들도 같은 일을 하고 계세요.

두 분의 어릴 적 생활이 궁금한데요, 학교생활에서 여러 가지 많은 경험이 있었을 것 같아요.

[구정연]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가장 많은 학생이 학교에 다녀서 저는 학교생활이 정말 즐거웠어요. 그리고 제 나이 또래가 가장 많아서, 저를 포함해서 8명이었거든요. 그 8명 중에서도 문제가 조금씩 있지만 대체적 즐거웠고요, 겨울이면 산에 가서 썰매도 타고 밭에 얼음이 얼면 어른들이 만들어주신 썰매도 타고, 여름에는 저수지에서 수영도 하고요.

[구슬] 저희가 동네로 들어가야 할 때는 'pass' 라는 확인증을 군인에게 보여 드려야 해요. 꼭 가지고 다녀야 하니까 친구들이 그 확인증을 볼 때 이것이 뭐냐고 신기해하기도 하고, 또 친구들 불러서 저희 동네를 구경시켜주려고 할 때도 확인증을 만들어줘야 하거든요. 그것을 신기해했던 기억도 있어요.

[구정연] 그리고 저희 동네를 오면 평소에 보지 못했던 북한을 눈앞에 보게 되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니까 다른 특별한 것은 없더라도 눈앞에 북한이 있다는 것 때문에 저희 동네에 오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북한 땅을 바라본 친구들은 무슨 말을 하던가요?

[구정연] 제 친구들이 처음 하는 말이, 저희 동네에는 길거리에 가로등이 많지 않거든요. 어둡고 사람들도 잘 걸어 다니지 않아요. 그러면 친구들이 ‘너는 이렇게 앞에 북한도 있고, 가끔 북한 방송도 나오고 어두운 동네에 사는 데 무섭지 않냐?’고 물어봐요. 그런데 저는 18년 동안 살면서 한 번도 무섭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친구들이 그렇게 물어봤을 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그런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구슬] 저도 친구들 많이 초대했는데, 친구들은 무서워하지 않고 눈앞에서 북한 건물을 보고 새로운 동네에 왔다는 신기함 때문에 다음에 또 놀러 오고 싶다고 말한 것 같아요.

그럼 아까 대성동 마을에 들어갈 때 확인증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교통편을 이용하거나 마을로 들어가는 절차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구정연] 우선 저희 동네까지 들어오는 버스는 단 한 대밖에 없어서 불편함을 겪었고요, 버스에 동네까지 들어오려면 많은 기다림과 제한이 있어요. 특히 버스기사 아저씨는 저희 동네의 주민이 아니라서 절차를 많이 거쳐야 했거든요. 또 해가 지고 밤이 되면 개인 활동을 할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 7시, 8시, 9시에 약속을 해서 한곳에 모이면 군인과 함께 마을로 들어가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요.

거기서 살다 보면 군인도 많이 보고 훈련도 많이 했을 것 같은데요

[구정연] 저희 동네는 50개 구의 일반 사람과 100명 정도의 군인이 함께 살아요. 저희는 그곳을 ‘민정반’이라고 부르는데요, 그곳에서 군인들이 먹고 자고 지키는 일을 해 주세요. 저희가 여름이 되면 저수지에 가서 같이 놀기도 하고, 저희가 친구들을 초대했을 때도 군인들이 친구들을 계속 주시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군인들과 함께 생활을 했거든요. 그래서 어느 곳을 가든지 군인들만 봐도 친근합니다.

[구 슬] 또 초등학교 때 크리스마스가 되면 미군 부대에 들어가서 미군, 한국 군인들과 같이 크리스마스 파티도 하고,

[구정연] 또 저희 동네를 거쳐 가는 데 미군 부대가 있었거든요. 거기를 거쳐 갈 때마다 미군 아저씨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래서 미군 아저씨들도 저희에게는 친근한 분이세요.

대성동 마을에는 밤마다 가끔 훈련도 있다면서요?

[구정연] 제 기억으로는 두세 달에 한 번씩 훈련을 하거든요. 새벽에 군인들이 집을 돌아다니면서 문을 두드리면서 비상사태입니다 하고, 그렇게 큰 것은 아니고 군인의 통제 아래 버스에 타는 훈련이에요. 당황하지 않고 전쟁이 나면 이렇게 버스에 타면 된다는 훈련이었습니다.

힘들지 않았어요?

힘들기보다는 밤 도중에 일어나거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하는 것이 겁이 났어요.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이유는 모르고 군인 아저씨들이 '이것은 전쟁을 위한 예비연습이다.' 라고 해서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구 슬] 저는 어렸을 때라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대성동 마을에 살면 여러 가지 혜택을 받는다고 하거든요. 어떤 지원을 받는지 설명해 주세요.

[구정연] 우선 세금을 안 내요. 집을 몇 채를 가져도 세금을 안 내고,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학비를 지원해줘요. 한국의 중․고등학교는 어느 정도 등록금을 내는데 저희는 지원이 있고요, 한국 남자는 군대에 가야 하는데, 저희 동네 주민이면 면제가 돼요.

그럼 대성동 마을에서 필요한 것도 많을 것 같고,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도 많았을 것 같은데 그런 어려움도 없었나요?

[구정연] 저희 동네에 작은 상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과자나 아이스크림밖에 안 팔았어요. 그런데 저희 동네에는 과일이 많거든요. 저희는 주로 과자나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사과나 살구를 따 먹었는데 그것도 작은 묘미였거든요.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대성동 마을이 머릿속에 그려져요. 자연과 함께 뛰놀고 그곳에서 농사도 짓고 농장을 운영하면서 평화롭게 사는 마을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도 남북분단의 현실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바라보는 북한 땅에 대한 느낌이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

[구슬] 저는 늘 북한 땅과 붙어사니까 편하고 무서움 없이 지내다가도 가끔 높은 곳에 올라가서 망원경으로 북한 마을을 보곤 해요. 그리고 북한 사람을 보곤 하는데, 아직도 신기하게 느낄 때가 있고요,

[구정연] 모든 게 좀 새롭긴 해요. 그런데 일상생활에서는 북한이 앞에 있음에도 북한에 대한 생활을 망각하고 있다가 가끔 기회가 있어서 북한을 보면 그곳을 황폐하고 아무것도 없고 북한 사람도 보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가끔 사람 보는 것도 신기하고, 때로는 안타깝고 측은하게 보여요. 어렸을 때도 북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힘든 삶을 살고 있구나.’ 란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혹시 북한 주민이나 북한 친구들과 접촉해 본 적 있나요?

[구정연] 저희는 없거든요. 그런데 저희 동네와 북한의 선전마을은 명확히 휴전선이 없어요. 가끔 저희 아버지나 동네 아저씨들이 그 앞의 조그만 강에 낚시하러 가시는데 우연히 그곳 가까이에서 벼농사를 하고 계시는 북한 주민을 봤고 대화를 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북한 주민 중 한 분이 저희 아빠에게 담배를 요구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약속도 하고 저희 아버지가 담배를 구해서 끈에 묶어 던져줬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구슬] 저는 제가 어렸을 때인데, 저희 동네의 할머니께서 아들이랑 도토리를 주우러 산에 갔는데 산에도 휴전선이 없거든요. 할머니와 아드님이 도토리를 줍다가 경계선을 넘어간 거예요. 그래서 북한 군인에게 잡혀서 '왜 넘어왔는지, 실수로 넘어왔는지'를 조사받고 나중에 풀려났거든요. 그 이야기를 듣고 좀 무서웠던 기억이 있어요.

요즘에도 그런 접촉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나요?

[구정연] 요즘에는 아무래도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북한 주민과 저희 동네 주민 사이에 대화가 가능할 만큼 경계가 느슨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북한도 경비가 삼엄해지고 이런 교류의 단속이 엄격해져서 어렸을 때 이후로 더는 없었습니다.

대성동 마을처럼 북한의 기정동 마을도 선전마을인데, 기정동 마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구정연] 대체로 집이 드문드문 있어요. 6~7층 되는 큰 빌딩도 몇 개 있고요, 그런데 저희 동네에서 망원경으로 기정동을 바라봤을 때 빌딩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심지어 집이나 빌딩조차도 너무 황폐하고 보이는 거예요. 심지어 가정집도 황폐해 보여서 저희는 그것을 봤을 때 '사람들이 살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가끔 길거리를 거니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들이 어디에 살지?'란 생각을 했습니다.

정연 씨와 슬이 씨가 그곳에서 태어나 자랐고 이제는 성인이 돼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나이인데, 요즘 바라보는 북한이나 남북관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요?

[구정연] 우선 어렸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북한의 모습만 바라보다가 가끔 신문이나 방송기사를 통해 북한의 소식을 듣곤 하거든요. 어렸을 때 북한을 바라본 저의 생각은 황폐하고 황량할지 몰라도 북한의 문제는 심각하게 접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러다가 뉴스가 기사를 통해서 기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짠하고 마치, 동네 주민, 가까운 사람의 일처럼 안타까운 것 같아요.

[구슬]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많이 접해오고 친근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크고 나서 북한에 대한 기사나 글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북한을) 비난하면 내 가까운 사람에게 욕을 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고, 그냥 북한에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있다고 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작년에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 사건이 있었어요. 대성동 마을은 늘 전쟁의 위험이 있다고 이해하기 쉬운데, 북한의 도발이 있었을 때 대성동 주민과 두 사람의 마음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구슬] 처음에 기사를 접했을 때 북한에서 가까운 동네라고 해서 저희 동네인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저희 동네는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많은 분이 희생돼서 걱정도 많이 했고요,

[구정연] 그리고 연평도나 백령도는 저희 동네와 많이 떨어졌지만 전쟁이 나거나 큰일이 나면 영향을 제일 먼저 받는 곳이 대성동이기 때문에 초조하고 불안했거든요. 당시에 어른들 걱정을 많이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성동에도 가끔 긴장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성동 마을은 아직도 전쟁의 아픔이 남아 있고, 여러 가지 긴장감이 감도는 곳이지만 그래도 자연과 함께 평화롭게 추억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함께 생활했던 친구 중에 대성동 마을에 대한 꿈과 희망을 품은 친구가 있나요?

[구정연] 제가 작년 설날을 맞아 대성동에 들어갔는데 우연히 버스 안에서 제 친구를 만났어요. 그 친구는 아직 대성동에 살고 있어요. 제가 친구에게 '그곳에 사는 것이 답답하지 않니?'하고 물어보니까 그 친구는 동네만의 매력에 빠져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사를 짓는 것이 꿈이었던 거예요. 저와는 다르게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구 슬] 제 친구들은 다 이사해서 대성동에 없어요. 다 저랑 똑같이 밖에서 자유롭게 지내는 것에 익숙해졌는데, 다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친구는 없는 것 같아요.

[구정연] 그런데 저 있었을 때 계셨던 운전기사 아저씨가 계시거든요. 그 아저씨는 30년 동안 동네 주민이나 학교 선생님을 태워주시는 일을 하고 계시고 동네 주민과 정말 친하세요. 그래서 가끔씩 그곳에 계신 분들을 통해 얘기를 들어보면 잘 계신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대성동 마을 주민이 많이 이사했다는 말도 했는데 대성동을 떠나는 이유가 뭐라고 보세요?

[구슬, 구정연] 아무래도 대성동에는 집과 논, 밭밖에 없고 여러 가지 불편함 때문에 많이 나가시는 것 같아요. 또 제 생각에는 한국의 부모님은 교육에 대한 열의가 큰 데 저희 동네에서는 교육에 대한 제한이 많거든요. 시설도 없고...대부분 자식의 교육을 위해 나가시는 것 같기도 해요. 자, 시간이 거의 다 돼서 이야기를 마쳐야 할 것 같은데요, 여러분의 고향인 대성동 마을은 두 사람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구슬] 대성동 마을을 제 마음에 살아 숨 쉬는 고향이고요, 나중에 있을 통일을 대비해서 도움이 되는 대성동 마을이 됐으면 좋겠어요.

[구정연] 저는 대성동 마을에 살아서 남들보다 통일에 대한 갈망이 큰 것 같아요. 대성동 마을에서 태어나고 오랜 기간을 살다보니까 이곳에 많은 의미와 추억, 기억이 담겨있어요. 이 대성동 마을을 잊고 싶지 않거든요. 제 소망이 있다면 어서 통일이 돼서 제가 눈으로만 봤던 북한의 기정동 마을을 직접 밟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비무장지대에 있어 주민이 아니면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마을, 대성동 현재 대성동 마을에는 50가구 이상 2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고요, 이곳의 농가소득은 약 6~7만 달러로 전국 농민의 평균 소득보다 월등히 많다고 합니다.

남북 분단의 현실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고 남북의 대치로 마음을 졸이며 살아가지만 이 자매는 물론 대성동 주민의 마음에 이 마을은 늘 소중하고 아름다운 고향으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노정민의 라디오 세상> 오늘 순서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시간에 찾아뵙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RFA 자유아시아방송,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