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련 북송사업 탈북자 가와사키 에이코 씨가 북한에 간 지 43년 만인 지난 2003년에 탈북해 북한에서 인권 부재의 지옥 같은 생활을 했다고 국제사회에 증언하며, 최근에는 미국 시애틀과 뉴욕 워싱턴 DC를 방문해,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속여 재일 한인과 인본인을 북한으로 가도록 유인한 뒤 굶주림 속에 살게 했으며, 신분 차별과 이동의 자유 제한 등 특히 여성들의 인권 부재 상황을 증언한바 있습니다.
에이코 씨는 자유아시아방송과 회견에서 17살에 북한으로 혼자 감으로써 43년 동안 부모 형제와 이산가족으로 살았고, 2003년에 탈북함으로써 이제는 북한의 자식들과 손자들과 이산가족으로 살아가는 한을 안고 산다고 했습니다. 그래 자신을 포함해 이산가족이 된 모든 분들이 일본을 자유 왕래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RFA 초대석 오늘은 ‘모두 모이자’ 대표 가와사키 에이코 씨와 회견을 통해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재일 한인들 어떻게 사는지 전화 회견을 통해 알아봅니다.
먼저 ‘모두 모이자’는 어떤 단체입니까?
에이코: 어쩌든 북한 인권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동참하겠다는 분들은 다 같이 하자 이런 뜻입니다.
현재 일본에서 어떤 활동 하시는지?
에이코: 일본에서 북한으로 북송된 사람들이 북한에 가서 어려운 생활 했는데, 그 사실을 일본이나 다른 국제사회에 많이 알리는 것이 하나고, 또 저보다 후에 일본으로 온 탈북자들에 대한 일본어 교육을 비롯한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모든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국에는 하나원이라는 전문기관이 있습니다만, 일본에는 전혀 그런 기관이 없기 때문에 제가 대신해서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변호사 연합에 인권 구제 신청서를 내신 바 있지요.
에이코: 가장 중요하게는 법을 통해서 북한의 잘못을 바로잡는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에 진행한 일로서 ‘인권 구제신청서’라는 것을 일본 변호사 연합에 2015년 1월에 제출했습니다. 일본의 변호사 연합이라고 하면 3만 명의 변호사들이 망라된 조직입니다. 거기 인권과에 ‘인권 구제신청서’라는 것을 냈었는데 이것은 재판은 아닙니다만 아주 큰 효과를 가지는 방법입니다. 원고는 10명의 탈북자하고 한 명의 재일 동포 그 재일 동포는 원래 조총련 간부였던 분인데 가족들 모두 북한으로 보내신 분이에요. 그 11명이 원고가 되고, 피고로는 이 북송사업에 관여한 모든 기관 즉 6개 기관인데, 그것을 모두 포함했습니다. 북한 정부, 일본 정부, 조총련, 북한적십자, 일본적십자, 적십자 국제위원회 등 이 6개 기관의 힘이 모두 모여서 북송사업이라는 재일 동포들을 북한으로 보내는 사업이 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섯 개 기관에 요구 조건을 두 가지를 걸었어요. 첫 번째 요구 조건은 그 옛날 실시된 북송사업이라는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 민주주의적 상황에서 보나 인권상황에서 보나 모든 면에서 잘못이었다는 것, 그것을 국제사회에 인정하라는 것, 성명을 발표하든 기자회견을 하든 각 기관이 알아서 진행하되, 어쨌든 국제사회 앞에서 북송사업에 관여한 것은 잘못이었다는 걸 밝히라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고, 두 번째 요구 조건은 일본에서 간 사람 본인과 가족들 그리고 2세 3세 까지를 일본만이라도 좋으니까 내왕의 자유를 인정 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직접 북한에서 살아 본 경험으로 일본에 가족들과 자유로운 연락은 됩니까?
에이코: 지금 북한은 수십만의 노동자를 외화벌이를 위해서 외국으로 내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도 북송된 사람은 끼지 못합니다. 일본에서 간 사람 그 자녀들까지도 한 사람도 끼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본에서 간 사람들은 모두가 그 나라에 발을 디뎌 놓으면 그만이고, 죽을 때까지 북한 안에만 딱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일본에서 북한까지 2시간이면 비행기 타면 갑니다.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이 마음대로 오가고 있습니다. 오직 북한에서만이 지금 혈육들도 오고 가지 못하고 자기 부모 형제가 죽을 때도 만나지도 못하고 다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로 허용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을 요구 조건에 건 것입니다.
국제 형사 재판소에 김정은과 조총련의 허정만을 제소하셨다고요.
에이코: 두 번째로 법적인 조처는 2018년 2월에 저하고 국제 변호사하고 둘이서 같이 네덜란드 헤이그로 갔습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 형사재판소에 김정은과 조총련의 허정만을 제소했습니다. 내가 왜 혼자서 갔는가 그것은 그 어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국가나 또 그 어떤 독재자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자유도, 인권도 짓밟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작년에 한국에서 오토 웜비오 부모들과도 만나셨다고요.
에이코: 작년 10월 말쯤 한국에서 이미일 박사가 조직한 모임에서 오토 웜비오 부모님들하고 저와 일본의 납치 피해자들을 초청해서 포럼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오토 웜비오 부모님들과 같이 앉아서 함께 스피치도 하고 인사도 하고, 또 지금 제가 진행하고 있는 재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그분들이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꼭 성과적으로 진행되기를 바란다고...그리고 이미일씨가 왜 이 행사를 진행하게 됐냐면 한국에서도 법적인 절차를 밟을 방향으로 전환하자고 한국에서도 법을 통해서 북한을 압박하는 그런 사업으로 전환하자는 의도에서 한국 사람들에게 이런 사업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달라는 그런 의미에서 포럼을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앞으로 같이 활약할 것을 약속했었습니다.
가와사키 에이코 씨가 남은 생애 동안 꼭 이뤄야 하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에이코: 지금 문재인 대통령이 하는 것처럼 우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제도는 그냥 두고, 북한의 독재 정권을 그냥 두고 테두리만 민주 통일되지 않습니다. 되지 않는 과 한 꿈을 문대통령이 내밀고 있는 거에요. 내가 3살 때 한반도가 분단됐습니다. 지금 내 나이 77살 입니다. 그렇게 절박하지 않습니다. 두 개의 조선으로 갈라지고 맙니다. 또 나 자신으로 놓고 봤을 때는 17살에 북한으로 혼자 감으로써 43년 동안을 내 부모 형제들하고 이산가족으로 살았습니다. 그렇고 하고 내가 2003년에 북한에서 탈북함으로써 내 자식들과 손자들과 이산가족이 됐습니다. 나는 평생을 이산가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이 문제를 단시일 내로 해결 하지 못한다면 난 살아서는 내 자식과 손자들 못보고 죽어야 된다는 그런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이 문제를 결정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장에 있습니다.
RFA 초대석 오늘은 모두 모이자 대표 가와사키 에이코 씨와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재일 한인들과 관련된 이야기로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인터뷰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