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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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6.25 전쟁 71주년 RFA 기획특집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한반도에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있은 지 71 년이 됩니다. 같은 민족이 서로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휴전상태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고 치유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요. RFA에서는 전쟁이 가져다 준 상처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오늘은 그 첫 순서로" 6.25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 입니다. 진행에는 이현기 기자입니다.

MUSIC(6.25 노래)

한국전 참전용사들 올해 나이 89세부터 96세까지로 김봉건, 강석희, 정규섭, 이경주, 박정희, 최창준, 이병희 6.25 참전용사들의 생생한 증언입니다.

MUSIC(진혼곡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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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LA에서 열린 6.25 사진전. /RFA Photo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 사시는 김봉건 노병, 올해 95세의 노병입니다. 1950년 평양 비행장을 점령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합니다.

김봉건 씨: 북한으로부터 1946년에 단신 월남해서 서울에서 서북 청년회 호림 대원의 한 사람으로서 일해 오다가 내 뜻이 있어서 군대에 입대했지요. 그래서 육군사관학교 제7기생으로 졸업해 육군 대위로 중대장으로서 6.25전쟁에 임했고, 전쟁에서는 제 하나의 남아 있는 공훈은 평양을 제일 먼저 들어가서 점령했다는 것, 저에게 남아 있는 제일 큰 공헌입니다. 바로 1950년 10월 19일 새벽 4시 30분에 평양 비행장을 제일 먼저 말을 타고 들어가서 평양 비행장을 점령한 것이 우리 보병 제1사단에 공적이 됐지요.

김봉건 씨는 지금이라도 한국 전쟁이 나면 참전해 싸우겠다고 다짐합니다.

김봉건 씨: 뭐 6.25 하게 되면 언제나 그립지요. 그때는 활발하게 청년 장교로서 활동했으니까 지금은 90이 넘지마는 그때 당시는 아주 활발했어요. 지금이라도 그때 당시와 같은 상황이 일어나면 언제든지 선봉에 나서서 활동할 수 있는 그런 용기가 백배합니다.

MUSIC(6.25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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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LA에서 열린 6.25 사진전. /RFA Photo

뉴욕 거주 참전용사 올해 90세의 강석희 씨, 지난 1950년 11월에 제1사단 수색대에 소속돼 참전했다 중공군이 던진 수류탄에 맞아 다쳤습니다.

강석희 씨: 중공군이 던진 수류탄에 맞아 전신이 그냥 쇳덩어리가 박혀서 그걸 다 빼내지 못하고, 거진 70년 가까운 해 동안 육신에서 욱신욱신하다가 요새는 겉으로 이렇게 삐죽삐죽 살에서 나와요. 그러니까는 메모리얼 데이가 오면은 먼저 간 그 전우들 생각도 하고 새록새록 한 옛날 전투상황이 되살아나지요.

6.25 전쟁 때 미군 참전이 없었다면 나라를 뺏겼을 거라고 말하는 강석희 씨

강석희 씨: 미군들 3만 7천명가량이 전사하지 않았어요. 그야말로 어디인지도 모르는 이 땅에 멀쩡한 젊은 사람들이 와서 열심히 싸웠어요. 미군이 없었다면은 우리 대한민국은 구제될 수가 없었지요. 미군들의 물자, 총에서부터 박격포 그리고 공군지원, 중공군 패퇴한 게 결국은 내가 볼 때는 로켓포 공격과 기관총 사격으로 나오니까는 견제 내지 못하지요.

MUSIC(6.25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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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맥아더 기념관에서 열린 잠수함연맹 행사에서 참전용사 이경주 씨와 정규섭 예비역 해군 제독이 함께 하고 있다. /RFA Photo

워싱턴 인근에 거주하는 해군 예비역 제독 정규섭 씨 올해 96세이시다. 625 전쟁 일어나자마자 한국은행의 금괴를 안전지역으로 옮긴 이야기

정규섭 씨: 저는 당시 해군 소령으로 국방부 제3국 1과장 대리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전쟁을 치렀는데, 우리가 서울을 후퇴하면서 치른 일들을 생각해보면 첫째로 한국은행에 지금(地金)을 안전한 진해로 후송하는 일과 대전 농협 창고에 많은 쌀을 부산으로 내려 보내는 일과 경주박물관 국보를 진해로 이송하는 일들을 수행했고 그 외에도 전쟁을 뒤에서 지원하는 병참 업무를 많이 수행했습니다.

정규섭 씨는 6.25 때 미군이 도와준 것을 감사하며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정규섭 씨: 6.25전쟁에서 초토화가 된 나라를 오늘과 같이 자랑할만한 나라가 된 것은 한미 동맹을 기점으로 해서 미국으로부터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과 북한과 손을 잡고서 난국을 개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MUSIC(진혼곡 연주)

한국 전쟁 당시 한국군 소위로 최전방에서 싸웠던 올해 93세 이경주 씨의 증언입니다.

이경주 씨: 군번 없는 학도병으로서 저 낙동강까지 후퇴했다가 또 거의 두만강까지 갔댔지요. 그리고 밀리고 밀고 올라가고 밀리고 이런 전쟁을, 펀치볼(1951년 8월 31일부터 9월 21일까지 미 1해병사단과 예속된 국군 해병 1연대가 강원도 양구군 해안분지(펀지볼)에서 치른 전투)큰 전투에서 정말로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같이 지켜주셨지….

이경주 씨는 6.25 참전한 것에 긍지를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경주 씨: 저는 군대 생활을 오래 안 했거든요. 나는 그 짧은 기간동안에도 6.25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긍지를 갖고 있어요. 그래서 대한민국 현역에서 나라를 지켰다는 것의 자존심이랄까 그건 대단합니다.

MUSIC(진혼곡 연주)

워싱턴 인근 거주 참전용사 박정희 씨는 한국전 참전의 가장 고마운 사람은 시골에서 군에 입대해 싸워준 용사들의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박정희 씨: 6.25 당시에 무식하고 가난한 전사들, 전방에서 배고프고, 서러운 입장에서 전사했던 사람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의 덕이다. 이거에요. 그 전투병들의 덕이에요. 최전방에서 수고하고 배고프고 헐벗은 시골에서 온 청년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자고 했습니다.

MUSIC(진혼곡 연주)

미국 로스앤젤레스 거주 6.25 참전용사 최창준 씨의 증언

최창준 씨: 1951년 2월 10일 소위로 임관했어요. 7사단 최전방으로 배치됐습니다. 전투가 치열했는데 7사단이 포위돼서 많은 전우들이 전사했어요. 그래도 용케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사실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는데, 참 그 당시에 유엔군이라야 미군이 주로 참전했는데, 미군이 우리를 막아주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도 없고, 그리고 우리 용사들이 그 당시에 참전하였기에 현재 대한민국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MUSIC(진혼곡 연주)

미국 메릴랜드에 사는 참전용사 이병희 씨 펀치볼 작전의 증언입니다.

이병희 씨: 다만 저도 전쟁 때 보병학교를 나와서 일선에 양구, 양구 쪽에 근무를 하면서 그 당시에 미군 보병 40사단을 지원하는 부대의 일원으로서 유명한 펀치볼 작전에서 얼마만큼 희생자가 나오는 관계를 직접 목격을 했고, 그런 분들을 위해서 제가 같이 동참한 것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병희 씨가 흥남 철수 때 목격한 이야기

이병희 씨: 우리가 마지막 배가 나오기 직전에 군수물자, 유류 탱크 등을 흥남 부두에 내놓고 그걸 군함에 가져오지 못하니까 함포사격으로 폭파한 장면을 목격했다고요. 아주 함포사격으로 불바다 그런 것을 내 눈으로 함상에서 목격했어요.

MUSIC(진혼곡 연주)

MC: 6.25 전쟁 71주년 RFA 기획특집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첫 순서로 "6.25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진행에는 이현기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