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 서울 수복일에 6.25전쟁을 회고하는 워싱턴 동포 참전용사 안홍균 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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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워싱턴 동포 안홍균 선생은 자신의 영문 책 'NINETY DAYS UNDER THE REDS', 즉 '적치하 90일' 이란 책에서 6.25전쟁 발발 전후부터 서울이 함락한 6월 28일의 서울 거리의 인민군 전차 이야기, 그리고 서울 수복까지 90일 동안의 인민군 점령하의 격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자유아시아방송과의 회견에서 밝혔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직전에 사단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유엔군사령부의 휴전협정 이행 지시문을 각 부대에 전달하면서 적의 탄막 포화로 사변 마지막 전사자가 될 뻔한 이야기, 육군 보병학교에 입교해 임관 후 전방에서 소대장 근무도 하고 8년 동안 군대 생활을 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안 선생은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며 전 세계 후세들에게 '한국의 자유 지킴이'로 나서기를 당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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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A 초대석 오늘은 안홍균 선생과 회견을 통해 직접 경험한 6.25 발발과 90일 간 인민군 치하에서의 어려웠던 이야기 함께 들어봅니다.

질문: 안 선생님 전화로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선 1950년 6월 25일을 회고해 주시지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안홍균: 1950년 6월 25일 날, 저는 그때 나이가 열여덟 살로 중학교 6학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대학 준비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6.25 전쟁이 발발해 저의 인생이 다 뒤 집혀 버렸어요. 저는 그때 서울 장충동에 살았고요. 그리고 6월 25일, 그날 기억이 나는 것은 국군장병들이 지프에 확성기를 달고서는 휴가병은 빨리 귀대하라는 차량 방송을 많이 해서 놀랬거든요. 왜 그랬는가 했는데! 6.25가 났을 당시 남한에서는 평화 무드가 상당히 팽배했어요. 왜 그런고 하니 이북의 평화 위장 전술에 넘어간 것입니다. 사변 직전에 이북에서 조만식 선생과 남쪽에서 복역하고 있던 공산당 인원2명과 교환하자고 하는 제안이 왔거든요. 그래서 남쪽에서는 이 제안을 환영했고, 또 그때 이북에서 3명으로 된 소위 그 평화사절단을 남쪽에 파견했어요. 평화와 통일을 논의하자고. 해서 남쪽에서는 아! 평화를 하고자 한다는 오판을 했습니다. 또 사변 한 달 전 부터 삼팔선에서 여러 가지 군사 충돌이 있었는데 6.25 직전에 인민군의 군사도발이 끝났거든요. 그래서 남쪽에서는 굉장히 안심을 하고 6.25가 난 그 주말에 국군 병력의 반 이상을 휴가를 보냈어요. 38선 전방이 거의 비었거든요. 이런 상태에서 6.25가 났습니다. 그때 남쪽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면 사변 나기 전날 토요일에 육군본부에서 신축 육군 장교구락부 개관 축하연을 열어 전 후방 고위 군 간부들이 참석해 굉장히 큰 파티를 하고 술을 많이 먹고, 그다음에 국군의 전방 지휘관들이 서울에서 자고 그랬어요. 그래서 완전히 전방의 빈틈을 노리고서는 이북에서 쳐들어온 겁니다. 정부나 군이나 국토방위의 직무를 유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는 되풀이 해서는 안 뒬 과오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면 1950년 6월 28일 아침 서울의 거리 지금도 기억나시지요.

안홍균: 그래서 큰 혼란 가운데 앞일을 걱정하고 있는데, 6월 28일에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우리 국군은 없어지고 길가에 인민군 전차가 많이 있어요. 깜짝 놀라 우리 대한민국이 어디로 갔나! 이렇게 허무한 생각을 했지요. 그게 6.25 시작이었습니다. 그래서는90일 동안 인민군의 점령하에 살았는데, 그때 고생한 것은 우선 기아 상태, 식량이 없어서 고생했고요. 전 시민이 자유를 잃고 공포 속에 숨죽이고 살았습니다. 또 하나 큰일은 인민군들이 자기들의 병력을 보충하려고 남쪽에 있는 청년들, 장정들을 길가에서 잡고, 학교에서 잡아서는 의용군에 보냈거든요. 그다음에는 길가에서 잡는 것이 안 되니까 각 집으로 새벽에 들어와서 수색해 잡아갔어요. 그래서 3개월 동안 의용군 피하려고 전 노력을 다해, 또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서 저는 의용군 가는 걸 피했지요. 적군의 병사가 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때 통절히 깨달은 것은 자유가 없는 삶, 공산당이 하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생각도 못 하는 그런 공포가 지배하는 숨 막히는 삶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 하는 것이였습니다. 진저리나는 경험이였지만 어찌 보면 소중한 깨달음을 안겨 준 경험이었습니다.

주로 어머니가 헌신적으로 도와주셔서 의용군에 안 갔는데, 9월 15일 아군의 인천 상륙 보도를 듣고 곧 해방이 될 것으로 기뻤습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가 겨우 19마일, 2. 3일이면 했는데 15일 걸렸어요. 서울 회복하는데요. 그때 마지막 15일 동안 굉장히 고생한 기억이 납니다.

질문: 육군 보병학교에 입교하신 이야기가 있으시죠.

안홍균: 그때 제가 선택했어야 하는데 하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 또 하나는 군대 가는 걸, 그런데 저는 군대 가는 걸 선택하고는 6개월 훈련받는 육군 보병학교에 입교했습니다. 6개월 후에 소위로 임관해서 전방에 갔지요, 전방에서 소대장도 하고 8년 동안 군대 생활을 했고요. 그다음에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같이 훈련받은 동기생이 150명인데 삼 분의 일이 전사했고, 삼 분의 일이 부상 당했고, 삼 분의 일이 살아남았습니다. 이런 혹독한 경험을 겪었지요. 초급장교로 말이지요.

질문: 미국 유학을 오게 된 이야기도 들려주시지요.

안홍균: 군 복무를 하는 동안 한이 뭐냐면, 대학에 못 간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장교는 제대를 못 했고 외국 유학 가면 가능했지요. 그러는 중 전방 근무 때 한 미국 장교를 만나서 그분이 저의 염원을 듣고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줘서 미국에 유학을 왔지요. 위스콘신에서 대학을 시작했습니다. 8년 늦게 말이지요. 대학을 마치고 워싱턴 D.C. 와서는 대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다음에는 워싱턴에 정착을 해서 제가 한 중요한 일에 코리아 게이트 박동선 사건 때 미 의회 조사위원회에서 2년 동안 일했고요. 그다음에는 그 미국 법무부에 소위 로비스트로 등록해서 15년 동안 한국과 일본의 무역 상사들에 대해 미국 무역 정책을 자문하는 일을 했고요. 그다음에 마지막을 연방 수사국에서 일했어요. 한 20년 동안 그것이 저의 워싱턴에서의 생활의 개략입니다.

질문: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안 내용을 각 부대에 전달하셨다고요.

안홍균: 네. 그래요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됐는데, 그때 제가 사단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서 휴전협정 지시 내용을 각 부대에 전달하는데 그때 적의 탄막 포격권에 들어가 전쟁 마지막 전사자가 될 뻔했습니다. 7월 27일 밤 10시에 휴전이 성립됐는데, 그때 저의 감정을 말하면은요. 우선은 전쟁이 끝났으니까 살아났다는 안도감, 그것이 저를 엄습했고, 또 하나는 나라가 초토화됐고 수십만의 피가 흘렀는데 통일의 꿈은 꿈으로 끝이 난 현실, 많이 분하고 억울한 생각이 저를 짓눌렀습니다. 70년 전의 그 감정 지금도 생생히 저의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질문: 전쟁을 겪지 않은 후세들에게 주는 말씀은

안홍균: 그다음에 이제 이런 전쟁 경험을 겪었는데, 제가 후배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나는 행인지 불행인지 6.25 전쟁을 통해서 공산 이북의 실태를 경험했습니다. 반면에 한국은 빈곤과 전쟁, 부패라는 국난이 몇 개 있었는데 이것을 우리는 극복을 하고 현재 부강한 자유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보통 공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지금 남쪽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항을 살펴보면 6.25 전야를 방불케 하는 안일한 평화 무드가 사회 전반에 퍼져있습니다. 전쟁에 대한 기억과 경각심은 사라지고, 너무나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태도로 상대방(북한)을 대하는 것 같아요. 이것이 굉장히 걱정됩니다. '자유는 지킬 줄 알아야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걱정이 많은데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하나의 허구이거든요. 우리가 아끼는 전통과 역사의 조선은 김일성 조선이 되였고 수령 유일사상 유일 체제는 민주주의의 정반대 체제이며 인민의 나라도 아니고 공화국은 더욱 아닌 허구의 백두혈통 김 아무게 세습왕조입니다. 나는 현재의 고국 상황이 70년 전 6.25 때와 너무 흡사하기 때문에 우리 후배들에게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부단의 노력을 기울리고, 강력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싶습니다.

질문: 어떻게 자유를 지켜야 합니까?

안홍균: '자유'는 인간에게 가장 귀하고 또 보존하기 어려운 가치 관념입니다. 자유는 공기를 닮아 이를 형유할 때 그 가치를 자칫 망각합니다. 하지만 일단 자유를 빼앗기면 우리는 삶의 의의와 행복을 포기해야 합니다. 문제는 자유를 부정하고 우리의 자유를 뺏으려는 위험한 집단이 항상 우리 눈앞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유를 부정해야 존립할 수 있는 체제입니다. 자유는 한번 빼앗기면 회복이 어렵습니다. 우리는 우리 선대가 이룩한 자유와 풍요로움을 즐기고 또 이를 우리 후대에 넘겨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자유를 누리는 것은 좋지만, 그 자유를 위해서는 계속해서 노력하고 평화를 위해서 싸워야 하지마는 그러나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계속 가져서 자유를 유지할 수 있는 그런 각오가 필요하고 노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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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A 초대석 오늘은 안홍균 선생과 회견을 통해 직접 경험한 6.25 발발과 90일 간 인민군 치하에서의 어려웠던 이야기 함께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회견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