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일을 많이 하면 피곤하고 좀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 집니다. 그런데 이 탈북여성은 행복하고 기쁘다고 말합니다. 환갑이 넘었지만 활동적으로 일할 수 있고 경제활동을 하면서 생활이 윤택해지는 것에 만족하기 때문이라는데요. 오늘은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노경미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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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미: 돈 모으는 재미도 있고 돈 높이가 올라가니까 행복지수도 더 높아져서 일을 더 열심히 하게 되고요. 건강도 좋아지더라고요. 계속 움직이니까.
남한생활 8년이 되는 노 씨는 쉬지 않고 일하면서도 힘든줄 모르고 웃고 삽니다. 그의 인생이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은 북한에서의 생활이 많은 영향을 줬는데요.
노경미: 북한에서는 그 누구나 없이 1990년 중반 이후는 고난의 행군 때를 겪을 때였거든요. 모든 장사를 다해봤어요. 빵장사, 떡장사, 두부장사, 파마도 하고요. 모든 것을 해도 안되니까 내가 아들하나 못 낳아보고 다 해봤다고 했어요. 내 동생이 중국에 친척이 있다보니 도강을 가만가만 했어요. 한 번 갔다오면 엄청 돈을 벌더라고요. 그러다가도 한 번 걸리다 보면 다 뺐기고 했어요. 그래도 또 두만강을 건너 장사를 해야지 사니까 했는데 어느날 언니도 이렇게 살지 말고 한 번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나와서 장사를 하라고 했어요. 가을철이었는데 중국에서 배따는 일을 하면 아무리 못해도 하루 30원을 버니까 한달만 벌어보라고 해서 돈을 벌자고 딸하고 두만강을 건넜어요. 1998년 9월 온성으로 넘어갔어요.
뭘해도 한끼 식사조차 보장 안됐던 북한을 떠나 중국에 갔지만 노 씨는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되기 일 수였고 그런 일이 반복 되면서 중국 쪽 두만강 변방에 있는 도문변방 감옥에 구류되면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게 됩니다.
노경미: 젊은 여자 하나가 북한의 정치에 대해서 김정일 정치가 틀린 정치라며 막 욕했어요. 거기에서 비방을 했다가는 북한에 전달되는데 정신병자다 그렇게 말한다 이랬어요. 우리는 그 여자가 정신병자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다음날 그 여자가 나간다는 거예요. 모두 어떻게 하면 북송 안 당하고 나갈 수 있는가 근심하는데 그 여자가 어떻게 나갔는가 했는데 그 여자는 탈북자는 맞는데 조선족과 결혼해 남한에 간 새터민이었던 거예요. 친정집이 온성이니까 두만강에 나가 연결해보려고 하다가 두만강 변방 경비대에게 붙잡힌 거예요. 그런데 시집에 연길에 있다 보니까 왜 며느릴 잡았는데 한국 사람이다 그리고 여권과 주민등록 증이 있으니까 협상이 된 것 같아요. 그때 감옥에 100명 정도 있었는데 모두 부러워서 울었어요. 그때 내가 결심한 것이 나도 북한에 갔다가 다시 중국에 나오면 무조건 남한에 갈 것이다 이결심으로 갔다가 나와서는 한국행을 선택한 거죠.
탈북과 중국에서의 강제북송이라는 10년 세월 끝에 지난 2009년 말에 남한에 가서는 하나원을 거쳐 그 다음해 제2의 인생을 맞습니다.
노경미: 제가 60대 나이를 바라보는 나이에 공부를 해야 뭘하며 어떻게 하는가 해서 직업의 귀천이 없는데 열심히 하면 살 수 있겠지 하면서 처음에는 안 해본 일이 없어요. 식당일, 정신병원 일도 하고요. 엄청 힘들더라고요. 하루는 식당일을 갔는데 파출부 소장이 와서는 내가 일하는 것을 보다가 자기한테 와서 일하라는 거예요. 식당보다는 시간도 짧고 쉽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의 말을 듣고 하루 가서 일해보니까 대우가 좋더라고요. 그때부터 내가 가사도우미로 일했어요.
기자: 북한에서는 파출부가 무슨 일인지 모를텐데 설명을 좀 해주시죠.
노경미: 파출부는 기본이 청소지만 청소뿐만 아니라 가정부 일도 하고 간병일도 하고요. 파출부 일이란 것이 기본적으로 가정집에 들어가 모든 것을 도우는 겁니다. 직업을 알선해 주는데 순수 가정집만 아니고 가정집, 병원, 필요한 곳에 사람을 보내주는 겁니다.
일한지 두 달만에 일용직 일자리를 알선하고 소개비를 받는 파출부 출장소를 나와서 자기 사업을 했는데요. 열심히 일하는 노 씨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꽤를 냈던 겁니다.
노경미: 가서 잘해주니까 나한테 고객이 생기더라고요. 그집에서 그냥 내 집에서 일해라 이러더라고요. 파출부로 소개받아 일하면 새로운 집에 가니까 힘들어요. 그런데 일단 집을 받아서 잘해주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쉬운 거예요. 가정집을 맡으면 한집을 매일 가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집 또는 두번씩 가니까 돈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전단지를 만들어서 아파트마다 다니면서 붙였어요. 알뜰한 청소 아줌마가 있으니 청소가 필요한 집은 연락주세요.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주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녁 12시까지 일자리 찾느라 붙이고 다녔어요. 그런데 그렇게 붙이기 시작하니까 그 다음날부터 한 30집씩 전화가 오더라고요.
입소문만큼 좋은 광고가 없죠. 성실히 일잘하는 아줌마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노 씨를 찾는 사람이 많아 졌습니다. 하루에 여러 곳을 다니며 청소를 해주고 집안일을 돕다 보니 저금통장에는 하루가 다르게 돈이 모였고 그것을 보면서 이유없이 싱글벙글 웃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노경미: 처음에 와서는 일욕심이 엄청 많았어요. 돈을 안 벌면 어떻게 사나 해서 처음에는 힘든줄 모르고 일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오랜 기간 일하니까 손을 보면 일을 내가 너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사람들은 직업을 한곳에서 오래 하질 못 하더라고요. 그런데 나는 8년을 계속 하고 있잖아요. 내 나이에 이렇게 일하는 사람이 많이 없어요. 나를 항상 부러워 할 때는 자신있게 말해요. 내가 행복한 사람이라고요. 일꺼리가 많은 것이 행복한 것 아닌가 하고요. 그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할 때면 나도 기뻐요.
요즘도 대학졸업자가 직업을 못구해 힘들다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리고 특히 같은 고향 사람이 남한에 정착을 못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을 듣지만 그럴때마나 노 씨는 이런 말을 합니다.
노경미: 우리가 국경을 넘어서 사선을 헤치고 이곳까지 올 때 그 의지를 가진다면 여기와서 정착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 젊은 사람들은 직업을 한달에 한 번씩 바꾸더라고요. 난 그때 일을 잡은 것을 8년동안 하고 있어도 남들이 우러러 보고 내가 손끝으로 돈을 억대를 벌었잖아요. 작년부터는 제가 국민연금을 받아요. 너무도 기쁜일이죠.
제2의 고향 오늘은 일하니 행복하다는 노경미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