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날이 있을 겁니다. 그중 하나는 생일일 겁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기쁜 날이 어떤 이에게는 아픔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20년전 1월 8일 두만강을 넘었던 함흥 열차방송원 정진화 씨의 남한생활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정진화: 99년은 아직 김정은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이라 그때 만약 김정은이 세상에 알려졌더라면 두만강을 넘는 것이 불리하지 않았겠는가 그런 말을 자주 했어요.
매년 탈북했던 1월 8일 즈음이면 너무나 추웠던 1999년 그날을 떠올립니다. 그때는 어찌나 추웠던지 조금 과장해서 내뱉던 입김조차 얼어 떨어질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정진화: 제가 1월 8일 두만강을 넘었을 때 당한 추위가 진짜 칼바람이었어요. 진짜 매서운 추위였어요. 6명이 함께 두만강을 넘었는데 겉에서 보는 두만강은 얼었는데 들어가서 수심이 약간 깊어지니까 얼음장이 무너져 내리고 거기서부터는 온몸이 다 얼었던 거죠. 두만강 폭이 한 100미터는 됐던거 같아요. 밤이라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지만 그 안에서 넘어지며 목까지 거의 물이 찼는데 급하니까 뒤도 안돌아보고 넘어지며 엎어지며 뒤도 안돌아 보고 앞만 보고 갔어요. 두만강에서 나와서 온몸이 얼은 상태에서 벌판에서 바람을 맞으며 한 30분에서 1시간을 있었는데 너무 추워서 그때 동상입은 후유증을 저는 아직 앓고 있어요.
온몸이 꽁꽁 얼어붙었는데 손발에 박힌 얼음은 요즘도 겨울이면 근질근질 한 것이 상처가 됐습니다. 정 씨는 함흥에서 태어나 함흥경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철도방송위원회 함흥주재 철도 방송원으로 일했습니다.
정진화: 저희는 함경북도를 삥도는 기본 동해안을 다 도는 구간을 다녔어요. 하는 일이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편성표에 근거해서 방송을 하는 거죠. 신문을 읽어주는 생방송도 있고 또 중앙쪽에 송출하는 라디오를 틀어서 중계하는 부분도 있고 아니면 원고를 가지고 직접 육성으로 읽어주는 부분도 있고 철도다 보니 사람들이 교통법규를 어떻게 지켜야하는지 해설하는 부분도 있고 중간중간 사람들이 지루하고 하니까 열차에서 지켜야 하는 상식을 가지고 극을 만들어서 그것을 녹음으로 잡아서 내보내는 거나 음악을 녹음을 잡아서 내보내는 것도 있고 저희가 2시간 방송에 15분 내지 20분씩 중간중간에 휴식을 하고 했어요.
함흥은 1990년 초부터 식량배급이 잘 안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결혼 후에는 한 번 나가면 며칠이 돼야 돌아오는 열차방송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는 생활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두만강을 넘게 됩니다. 요즘은 도강하는데만 미화로 1만달러 이상으로 부르는 것이 값이라고 하지만 1999년 그때만 해도 담배 한 막대기(보루)만 고이면 또는 돌아올 때 얼마를 줄께 라고 하면 국경경비대도 눈감아 주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후에는 중국에서 3년 7개월을 살다 남한행을 하게 됩니다. 북한에서 8년간 일했던 열차방송원은 남한에서 탔던 기차가 신기했는데요.
정진화: 처음에 지하철 타면 낮에도 방송이 나오잖아요. 오늘 하루도 어떤 날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방송이 나오는데 한국의 열차에도 방송이 있는줄 알았는데 사실 열차방송원이 하는 것이 아니고 기관사분인지 조수분이 마이크로 하고 KTX에도 이야기를 해요. 뉴스는 연합뉴스 송출을 하는데 무슨 대전역입니다. 무슨 부산역입니다 하는 것은 열차방송원이 아니라 승무원분이 열차 벽에 부착된 마이트로 그때그때 상황이 발생할때마다 직접 육성으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북한은 열차방송실이라고 있는데 성원 외 출입금지있는 방이 따로 있습니다. 거기에 기계도 있고 저희가 가지고 다니는 녹음물도 있고 녹음기도 있고 신문, 원고 등이 있습니다. 그런면에서는 조금 신기했죠. 그리고 한국의 열차에서는 구태여 북한처럼 방송을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여기서 부산이면 2시반 반이면 내리는데 북한은 한번 오르면 거의 하루를 넘겨야 하니까요. 북한의 장거리 열차는 거의 24시간을 넘기거든요. 왜냐하면 사고, 전기가 안온다 어떤 상황이 발생했다고 하면 24시간 48시간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게 5일 이거든요. 한국엔 오르자마다 내려야 하니 열차방송이 필요없을 것같아요.
남한생활 16년.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탈북의 그날 정 씨는 고향 생각에 마음이 울렁였답니다.
정진화: 제가 어제도 친구들 만나서 그랬어요. 내가 북한을 떠난지 20년 되는 날이다. 잠이 안 온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북한은 어떻게 저렇게도 안 변하지… 그런 얘기를 했었어요. 5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3시반까지는 못 잔 것 같아요. 이런 저런 생각도 나고 고향 생각도 나고 20년이 훌쩍 너무 빨리가버린 느낌도 들고….
남쪽에서 마흔살에 낳은 아들은 이제 엄마보다 더 키가 크게 잘 자라줬습니다. 남한생활에 정착하느라 고생도 많았지만 아들만 보면 모든 피로가 확 풀린답니다.
정진화: 한국에 와서 낳은 아들이 올해 이제 중학교 3학년이예요. 사실 나이가 있어서 낳았는데 지금은 이제 키도 170센티고 중학교 3학년 되고 하니까 한국에서 제일 잘한 것이 아들 낳은 것 같아요. 저는 북한사람이지만 아들은 서울서 태어났고 저는 사회주의 교육을 받았지만 아들은 체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가 배우고 싶은 것 배우고요. 아들이 성장하면서 아이가 커가는 것이 미래인 것 같고 그것을 보면서 저도 꿈이 같이 이뤄지는 것 같아요.
탈북자들의 정착과 성공사례를 취재해서 글을 쓰는 기자로 또 통일을 대비해 북한의 실정을 남한사람들에게 알려주는 통일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정진화 씨.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면서 건강하게 생활하고자 한답니다.
정진화: 정말 자유를 찾아 온 사람들이 원하는 자유를 누리는 모습을 많이 봐요. 이게 자유다. 물론 정말 극소수의 빗나간 삶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정말 열심히 잘 살고 있어요. 일단 이 사회가 노력만 하면 북한처럼 내일은 뭘 먹지, 이번 겨울은 어떻게 나지 이런 걱정은 안하고 살 수 있는 사회잖아요. 북한주민들은 이번 겨울에도 많이 어렵다고 들었어요. 김정은이 방중을 해서 어떤 선물을 들고 북한주민들에게 갈지 모르겠는데 북한주민들에게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었으면 좋겠고 이 겨울에 얼마나 춥겠습니까?
저는 1월 8일만 생각하면 그렇게 추운데 어떻게 살았나 싶어요. 지금 여기 기온이 영하 10도가 되는 날이 별로 없는데도 추워요. 처음에 왔을 때는 하나도 안 추웠거든요. 텔레비전에서 날이 추우니 옷을 든든히 입고 나가라고 하면 정말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아나운서가 말을 안해도 내가 옷을 끼어 입고 든든하게 하고 나가가든요. 16년이 되고 하니까 한국에 많이 적응해서 여기가 고향이 된 것 같아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함흥에서 열차방송원으로 일했던 정진화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