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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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손녀의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잡고 추운 겨울 꽁꽁언 강을 건너 탈북한 여성이 남한에 갑니다. 물론 그 사이 중국에서 숨어살아야 했고 또 남한행을 위해 제3국을 거치는 험한 여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남한에 정착을 했는데요. 오늘은 양강도 혜산 출신의 유혜림(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유혜림: 산에 눈이 있을 때는 아무것도 못하고 산에서 빙빙 돌다가 주인집 할머니가 내려오라고 소리치면 내려가고 4월에는 밭을 일궈서 밭일을 했어요.

올해 58세가 된 유 씨는 지금도 탈북해 중국에서 숨어 살때를 생각하면 심장이 오그라든다고 합니다. 숨바꼭질 놀이도 않이고 큰 죄를 진것도 아닌데 중국공안에 언제 잡혀 북송이 될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왜 이런 생활을 해야 하는 탈북을 하는 것일까?

유혜림: 저는 2009년 11월 강을 넘었어요. 당시 강을 넘게된 동기는 둘쨋딸이 장사간다고 집을 나갔다 안들어 왔거든요. 인편으로 알아보니까 개천에서 봤다고 하더라고요. 거기 친구하고 갔다가 협작을 당해서 그길로 집에 못 들어오겠으니까 중국과 밀수하는 브로커한테 가서 돈을 벌게 해달라고 했고 브로커가 중국에 팔아먹었거든요.

유 씨의 탈북은 10여년 전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압록강을 건너야 했던 때로부터 시작합니다. 집안 살림은 쪼그라 들었고 모두 먹고 살자고 열심히 이리뛰고 저리뛰고 했지만 살자고 발버둥 칠수록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둘쨋딸은 협작을 당해 사라지고 동생을 찾겠다고 나선 맏딸까지 엄마의 곁을 떠납니다.

유혜림: 우리 큰딸이 밀수하다가 빚진돈이 있었어요. 군인이 밀수품 돈을 다 떼먹다보니 그 돈을 벌자고 저도 개천 달리기도 하고 산에가서 약초도 캐고 힘들게 있던 상태에서 3년만에 작은 딸이 중국에 갔다가 왔더라고요. 마침 우리가 삼지연 쪽에 장사하러 간사이에 와서 없으니까 또 다시 중국으로 달아났어요. 전화번호를 적어놓고 가서 언니가 동생을 찾겠다고 중국에 연락을 해서 데려온다고 갔는데 큰딸이 가서 보니까 중국 현실이 좋았던 거죠. 우리는 빛을 갚겠다고 장사도 하고 허망하게 다녔어요. 봄에부터 약초 켜고 가을에 잣가지 뜯고 나무껍데기도 벗기고 해도 돈이 안되더라고요. 그때 큰딸이 중국에 가보니 중국이 너무 좋았죠. 큰딸도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중국 조선족을 만나서…

남한에 간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많은 수의 북한주민이 배가 고파 살기위해서 중국으로 도강을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배급이 완전히 끊긴 고난의 행군 시절인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 초반에 벌어진 일입니다. 특히 함경남북도 그러니까 두만강 연선에서 상대적으로 쉽게 중국 쪽으로 도강 할 수 있는 북한주민이 그랬습니다. 일들은 강을 건너는 순간 탈북자로 낙인이 찍혔고 더 이상 배는 곯지 않았지만 죄인아닌 죄인이 돼서 중국 땅에서 조차 숨어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한 번 중국 땅을 밟았던 탈북자는 공안에 잡혀 강제북송이 돼도 다시 재탈북해 중국을 찾는 일이 반복 됩니다.

유혜림: 우리를 데리러 왔더라고요. 중국에 가면 배불리 밥은 먹는다. 동생도 찾는다고요. 저는 진짜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어요. 엄마를 모시고 있었거든요. 내가 중국가서 돈을 벌어서 다시 온다고 엄마에게 약속하고 한달 아니면 늦어도 석달이면 온다고 떠난 길이 이젠 10년이 된 것 같아요. 내가 여기 남한에 온지도 7년이 됐거든요.

동생을 찾으러 갔던 맏딸이 중국에서 돌아와선 엄마와 함께 다시 강을 건넜고 이후 유 씨는 손녀를 데리고 남한으로 갑니다. 유 씨는 2010년 남한에서 사회정착교육시설인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대구에 있는 집에 들어갔던 순간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유혜림: 집에 들어와서 보니까 북에 있는 군의 군당책임비서도 이런 집에 못있어요. 우린 정말 좋은 집을 받았어요. 구민아파트고 새집이고요. 문을 열고 들어오니까 집은 큰데 아무것도 없잖아요. 손녀 6살 된 것을 데리고 왔는데 나보고 할머니 우리집이다 하면서 너무 좋아하잖아요. 아무것도 없는데 변죽에 기대 앉으니까 우리 가방 두 개 끌고 나온 것밖에 없지 너무 좋아도 이제 우리 어떻게 사나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잠시더군요. 가스하는 사람이 와서 연결해주지 관리사무소에서 다 말해주지 다음날 아침 6시에 담당형사가 오고…그때 그 고마운 마음이라는 것은 말할 수가 없었어요. 마음만 붕떠서 우리가 바라는 한국에 와서 산다 그때까지만 해도 실감이 안났는데 다음날 아침 사람들이 오고 봉사자들이 와서 해주니까 완전 꿈만 같았죠. 우린 상상도 못한 일이었어요. 우리 손녀는 너무 좋아서 그냥 좋다기만 하고 막 뛰어다니기만 하는데 그냥 앉아서 눈물만 흘렸어요.

17평 최신형 아파트에서 6살된 손녀와 남한생활을 시작했다는 유 씨. 북한에서 그리고 탈북해 중국에서 살았던 환경과는 너무 달라진 것에 마냥 좋아만 하는 손녀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합니다. 물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걱정도 됐는데요.

유혜림: 제가 여기 와서 제일먼저 한 것은 요양보호사 자격증 땄는데 그때는 손녀 학교 데려다 주느라고 일을 못하고 3학년 돼서 짬짬히 아이 학교 간 다음에 한일이 세탁소에서 다림질 하는 일했어요. 그리고 농촌에 봄에 나가서 사과꽃도 따고 사과접이도 하고 주말에는 식당 알바도 하고…

북한에서 함께 탈북한 손녀는 유 씨와 마찮가지로 남한정부로부터 탈북자 지원을 받습니다. 다만 성인이 될때까지 모든 지원은 보호자인 유 씨가 대리인으로 관리하게 됩니다. 큰 돈은 아니었지만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었기에 정부에서 생활보호대상자로 도움을 줘서 직장생활을 하지 않아도 생계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유혜림: 정부에서 미성년을 데리고 있다고 생계비를 주더라고요. 정부 생활비를 받고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대학을 다니고 손녀가 어리다 보니까..그리고 작년부터는 환자 진단서를 내서 생계비를 받고 있어요. 한달에 10일 정도는 제가 알바를 해서 생활하고 있어요.

남한에 간 탈북자들이 밤에 잠자리 걱정 않고 매끼 먹을 것을 찾아 다니는 수고를 덜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걱정근심이 사라졌다곤 말하기 힘들어보입니다.

유혜림: 중국에 있는 딸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연락이 안 되고 북에 있는 딸은 수용소에 갔다는 말도 듣고 제작년에는 총살당했다는 말도 들었는데 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해서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손녀도 엄마 얼굴을 다 잊어먹어 간다고 자꾸 말하거든요. 제 소망은 완전한 통일은 못돼도 남북한 교류만이라고 있으면 만날 날이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고…

제2의 고향 오늘은 양강도 혜산 출신의 유혜림(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렸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유 씨가 대학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취득해야 했던 이유와 손녀가 다시 웃음을 찾게 된 사연 들려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