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통일부에 따르면 남한에는 현 재 3만명이 넘는 탈북자가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목숨을 건 탈북에 이어 위험한 제3국을 경유해 남한에 입국합니다. 그리고 이들 탈북자 북한에서 경험하지 못한 자유와 경제적 풍요로움으로 대부분 남한생활에 만족한다고 하는 데요. 그런데 그에 못지 않은 아픔도 있습니다. 바로 탈북과정에서 또는 아직 북한에 남겨진 가족으로 인한 이산의 고통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오늘은 탈북해 중국에서 헤어진 큰언니를 찾고 있는 김경옥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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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옥: 저희가 방송에도 많이 나갔었고 미국, 독일, 캐나다 방송에도 나갔고 …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김 씨는 지난 2007년 겨울 12살 되던 해 엄마를 따라 탈북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거쳐 현재 남한에 살고 있는데요. 그동안 언니를 찾기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아직 큰언니의 행방을 알지 못합니다.
김경옥: 브로커를 통해 중국에서 수소문 해서 언니를 찾으려고 돈도 많이 쓰고 노력했는데 아직까지 소식을 몰라요. 가장 슬픈 것은 북한에 있는 가족들 때문에 저희 언니 이름도 밝히지 못하고 엄마 이름도 가명이다보니까 첫째 언니가 더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니 너무 슬프더라고요. 저는 동생이니까 김경옥이란 이름 하나만은 내보내고 싶어요.
북한에 있는 가족의 안전과 함께 헤어진 큰언니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 언니의 이름과 신상에 대해 조금만 더 속시원히 말하면 좋으련만 그럴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름과 가족관계를 밝히면 언니도 못 찾으면서 북한에 있는 가족이 피해를 볼까봐서 말을 아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간력하나마 언니와 경옥 씨만 알 수 있는 둘만의 이야기로 대신 할 수밖에 없는데요.
기자: 김경옥이란 본명을 쓰는 이유는 언니가 방송을 듣고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했는데 언니에게 한말씀 해주세요.
김경옥: 저의 언니는 동생들을 위해서 아빠같고 엄마같고 또 우리의 언니이기도 했어요. 그 언니는 자존심이 쎄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은 전부 해야 적성이 풀이는 사람이었어요. 어느날 할머니에게 대들어서 할머니한테 뺨을 맞았어요. 그래서 울면서 나간 적도 있었고요. 2004년에 엄마가 중국을 갔는데 그때 큰언니가 잠깐 집을 나가서 다른 곳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는데 가족과 연락이 안됐어요. 내가 학교 가고 있었는데 큰언니가 분홍색 치마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가더라고요. 그래서 울면서 달려갔더니 언니가 자전거를 세우더라고요. 내가 울면서 언니 다시 집에 들어오면 안돼? 그랬는데 언니가 마지막으로 준 것이 초콜렛이었거든요. 언니는 엄마 찾아 갈꺼야 이랬거든요. 그런데 엄마가 중국에서 다시 와서 저와 중국에 가서 첫째 언니와 연락이 닿아서 첫째 언니를 중국으로 데려왔어요. 그런데 그때 그 브로커가 중국까지 넘어왔다고 했는데 언니를 어디 팔아먹었는지 중국에서 첫째 언니를 잃어버렸어요.
언니와의 마지막 순간을 잊지 못하고10여년을 살아온 김경옥 씨. 남한에선 홀로서기를 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김경옥: 저는 한국에 2008년에 와서 엄마가 창원으로 초등학교 발령이 나면서 그때부터 엄마랑 떨어져 살게 됐거든요. 한국 와서도 엄마와 같이 산 기억이 많이 없어요. 13살때부터 제가 혼자 살아오면서 학교 마치고 오면 항상 아르바이크를 했거든요. 그때는 제가 성인이 아니어서 부모님 동의를 구하고 전단지 아르바이트, 신문배달 그리고 감자탕 집에서 일했는데 거기서 어린친구들은 안받아서 감자탕집 뒤에 천막 쳐놓고 그 안에서 그릇씻고 설거지 하고 그런 일을 했어요. 친구사귀려고 해도 돈이 필요하고 …엄마는 반대하셨어요. 한국까지 와서 왜 이렇게 힘들게 사냐고 내딸이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다른 평범한 학생처럼 살아달라고 하셨는데 제가 돈을 벌게 됐었어요.
보통 남한 아이들 13살이면 초등학교 6학년으로 부모의 사랑속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학교생활과 동무들과 뛰놀며 지낼때 입니다. 그런 나이에 경옥 씨는 독립적인 생활을 했는데요. 이런 정신은 그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청소년 시절을 거져 현재까지 이어집니다.
김경옥: 우선 저는 고등학교 때 평생직업을 갖기 위해서 헤어 디자이너 쪽으로 가서 자격증을 땄고요. 자동차 면허증은 당연한 것이고요. 그리고 한글 엑셀, 네일아트, 메이컵 자격증도 있습니다.
기자: 얘기를 들어보면 일반직업이 아니고 창업을 생각하신 것 같아요?
김경옥: 초반에는 헤어샵에서 일하려고 해서 4년을 해서 디자이너 자격증도 다 땄는데 생각을 해보니까 평생 직장을 하기엔 안맞는 것같고 그쪽 보다는 제가 좋아하고 제가 행복해 하는 일을 찾으려고 그 일을 그만 두고 여러 일을 했어요.
기자: 이번에 트럭 1종 면허 시험을 보는 것으로 아는데 1종 면허를 따려는 이유는 뭔가요?
김경옥: 로드 매니저를 하려면 트럭 1종이 있어야 해요. 지금 책임질 분이 연예인 한명 일수도 있지만 가수 아이돌이면 그 수가 10열 이상이고 그 사람들을 책임져야 하니까 밴을 운전하려면 2종이 아니라 제 꿈을 실천하려면 1종 면허가 있어야 해요.
로드매니저라는 직업은 보통 연예인의 그림자라고 불리는데요. 연예인 일정메 맞춰 이동을 책임져 주고 항상 붙어 다니면서 편의를 제공하는 일을 맡습니다. 김경옥 씨는 자신이 좋아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일인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또 화려한 직업인 연예인과 늘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한 겁니다. 물론 나중에 어떤 모습일지는 몰라도 최소한 지금 그 일을 하기 위해 준비 단계에 있는 것이죠. 김경옥 씨는 언니와 남한에서 재회하는 그날을 기다리면서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을 조급함 없이 이어갈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김경옥: 제가 알바를 하던 시절이 있었고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일반 회사에 들어가려고 했어요. 제가 생각하기엔 일도 남자친구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반반으로 생각하고 생활하고 있어요. 또 한국에 저보다 더 못살고 형편이 어려운 가정도 얼마나 많아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정말 행복한 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항상 힘내면서 살아가는 것 같아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해 중국에서 헤어진 큰언니를 찾고 있는 김경옥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