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자기가 뭘 잘 할 수 있는지 모르고 살던 북한주민이 남한에서 잠재능력을 개발해 새로운 인생을 사는 분이 많습니다. 모든 것을 나라에서 지시하는 데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는 삶을 살다 보니 나타나는 현상인데요. 오늘은 남한이 자신에게 기회의 땅이었다고 말하는 탈북여성 정문아(가명) 씨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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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아: 제가 한국에 와서 했던 일들이 세탁소와 식당일이 직업의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뭐야 이런 직업도 있어 하면서 뭔가 알아가는 것이 신기한 거예요. 이런 것들이 한국이 나한테 준 매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정 씨는 남한생활 초기에는 대부분의 탈북자가 경험하는 평범한 생활을 했습니다. 식당일과 같은 단순 노동일부터 시작해서 작은 가게 주인이 되고 그런 것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컴퓨터 영상관련 일을 하고 있는데요. 북한에 살 때는 가족이 먹고 사는 일 그리고 배정받은 직장 일만 하면 됐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정문아: 2004년도에 중국에 가면 일당벌이를 할 수 있다는 소문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내가 가서 돈을 벌어서 집안 살림에 도움이 돼야겠다. 이대로면 다 죽을 것 같다. 중국가면 일당을 벌 수 있다고 하니까 친구가 가보자고 하니까 갔거든요. 그 친구는 경험도 많고 넘어가면 농촌인데 농사일을 거들어주면 중국 돈으로 하루 5원을 벌 수 있다고 하니까 저는 단순하게 생각을 했고 중국에 가면 사람들이 보지 않는 구석 같은 곳에 가서 돈을 뽑아 오는 줄 알았어요. 그만큼 제가 세상을 몰랐던 거죠.
청진에 살던 26살 정 씨는 이렇게 단순한 생각으로 친구와 강을 건넜습니다.
기자: 두만강을 건너신 건데 잠시 돈 벌러 갔어도 당장 필요한 물건을 챙겨 갔을 텐데 뭘 가져가셨나요?
정문아: 친구가 갈 때 강아지를 가져가서 팔면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강아지 한 마리씩 가져 가자고 해서 강아지 한 마리씩 메고 갔었거든요.
기자: 키우던 강아지가 아니고 중국에서 팔려고 강아지를 샀군요?
정문아: 중국가면 더 비싸게 받을 수 있다고 열 배를 받는 다고 해서 강아지를 메고 갔는데 새벽에 강을 건너는데 소리 나면 들키니까 강아지 넣은 비닐 봉투를 감고…강아지를 팔고 그 돈이랑 일해서 번 돈을 가지고 오리라는 생각으로 갔거든요.
중국에서는 2년을 살다 신분을 보장해 준다는 남한으로 갑니다. 처음 도착한 남한 땅은 두려움뿐이었는데요.
정문아: 아파트를 받았는데 제가 1층에 내려가질 못하고 밖에만 내려다 보면서 한국은 썩고 병든 자본주의 사회고 부패가 심한 나라라는 교육을 받아서 무서워 못나갔어요. 내가 밖에 나가면 누군가 내 것을 훔쳐갈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틀 동안 못나가고 있었는데 같은 층에 있던 친구가 먼저 온 이모가 있는데 그 이모부가 왔으니까 같이 나가자고 해서 그 친구 손을 잡고 처음 1층을 내려갔다니까요.
기자: 중국에 있을 때는 한국에 대해 전혀 몰랐나요?
정문아: 제 남편이 한국에 가면 신분해결이 되니까 여기서는 불안하다고 애까지 있으니까
기자: 중국에서 남한방송은 안 봤습니까?
정문아: 드라마는 봤어요. 그런데 저는 워낙 텔레비전을 좋아는 안 하는데 가끔 보면 저건 멋있어도 다 거짓말이야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기자: 처음 직접 보는 남한세상의 느낌은 어땠습니까?
정문아: 그냥 깨끗하네, 차가 많네 이런 생각만 하고 여기 멋있네 이런 생각은 안 했거든요. 하려고도 안하고요. 먼가 저한테 접촉해 오는 사람들은 다 저를 해코지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만 하고요. 그런데 이모부가 우리를 데리고 핸드폰도 개통을 해주고 살림에 필요한 소소한 것들을 구매해 주고 했는데 그때 정착금 200만원을 가지고 나왔는데 하루에 200만원을 다 써버렸어요.
기자: 뭘 처음에 사셨나요?
정문아: 뭘 샀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돈에 대한 개념이 없으니까 있는 거 다 쓰고 왔거든요. 한국에서 그때 당시 월급이 120만원인가 했는데 거의 두 달치 월급을 쓴 거죠. 너무 사회를 몰랐던 거죠.
남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너무 몰랐고 그래서 두려움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너무 좋았습니다. 자유가 있었고 고생한 것에 대한 보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문아: 의심을 엄청 했었는데 의외로 제가 빨리 적응을 한 것이 두렵다 이런 생각을 했는데 한 번 나가보고는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이모부가 우리를 데리고 나이트를 데려 갔었어요. 저희는 나이트가 뭔지 모르잖아요. 어떻게 노는지도 모르고 앉아 구경 하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렇게 하고 오니까 두려움이 어느새 없어진 거예요. 그리고 나서 이제 저는 태국으로 오면서 교회 영향을 많이 많았는데 우리 집 수리를 하러 오신 분에게 교회 다니고 싶다고 하니까 그분이 바로 저를 그날 교회 데려 가셨거든요. 교회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내가 돈을 벌고 싶다고 하니까 일자리를 소개해 줘서 바로 다음날부터 식당일을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일하다 보니 내가 두려워 이런 생각을 언제 했던가 싶게 재미있고 적응을 잘 했던 것 같아요.
정 씨에게 변화가 찾아 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열심히 일해서 벌고 돈을 받으면 다 써버리는 생활을 했는데 저축에 대해 알게 되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계획을 세우고 준비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정문아: 월급을 받으면 다 쓰고 저축에 대한 개념도 없었는데 친구가 자유시민대학이라고 있다고 해서 갔는데 거기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왜 우리가 저축을 해야 하고 보험을 들어야 하는가를요. 그때 저축을 왜 하는가를 알았던 거예요. 그렇게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아무 개념이 없었는데 지금 와서 제가 느끼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라서 이런 것이 가능하네. 자본주의 사회라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결국은 내가 원하는 일을 찾을 수 있었고 너무 행복한 거예요.
우선 단순노동 일보다 자기 가게를 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 도전을 합니다.
정문아: 세탁소를 운영했거든요. 다른 사람이 하던 것을 넘겨 받았는데 적자였던 업소를 한 6개월 정도 해서 흑자로 만들었던 거 같아요. 한 3년 정도 운영하다가 제가 사이버 외국어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어 학사 졸업장을 받으면서 동시에 컴퓨터 관련 구직광고를 보고 글을 올렸는데 무역회사에서 면접을 보자고 해서 제가 합격이 됐어요. 그래서 무역회사에 취직을 해서 출장도 많이 가고 그때 제가 눈높이를 많이 키웠어요.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공부해 대학 졸업장을 갖게 됐고 취직도 합니다. 그리고 정 씨는 직장생활을 하게 됩니다.
정문아: 제가 중국어 때문에 홍보실에 들어간 것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이 돼있으니까 무역회사 사장님이 일하라고 던져주신 거예요. 훗날 들어보니까 그때 던져 줄 때는 하리라고 생각을 못하셨대요. 그런데 해내니까……
현재는 인터넷 사용이 세계 제일이라는 남한에서 조차 새로운 분야인 홀로그램 영상광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문아: 제가 지금 하는 일은 영상 편집 인데요. 영상 편집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요. 어떤 분은 움직이는 영상을 찍어서 늘리고 줄이고 이런 식으로 하는데 저희는 그려요. 그리고 그것으로 영상을 연출하는 거예요. 연출 방식에도 홀로그램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저는 현장에 따라서 만들어 주는 거예요.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았고 그 직업에서 행복을 느끼는 정문아 씨
정문아: 이 일은 내가 평생 해야 한다고 일에 홀랑 빠졌어요. 이전에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했는데 지금은 나는 돈을 안 벌어도 좋아, 너무 좋아, 이 일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제 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정문아(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