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최근 남북정상회담이 군사분계선 판문점에서 있었습니다. 이를 보며 남한에 정착한 3만 명의 탈북자들도 밤잠을 설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는데요. 그 심정은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오늘은 탈북과 강제북송을 그리고 재탈북해 남한에 정착한 함경북도 청진 출신의 김민주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민주: 예술단에서 성악배우로 활동 했어요. 진짜 중앙에서 나라는 사람들 딱 잡았으면 큰 소리일꾼이 됐지 내가 중앙에만 있었으면…
북한에서 선택된 배우로서 30세가 넘어서도 예술활동을 했다는 김민주 씨. 지금은 남한에서 북한민요를 부르고 있습니다. 김 씨는 이번 정상회담을 보면서 북한에 있는 가족을 다시 떠올리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김민주: 국민이 먹고 살아야 하는데 너무 힘들게 살고 다 굶어서 병들고 나와 보니까 경제제재를 받는데 이것이 언제 풀려서 조카들과 북한 사람들이 마음 편히 우리처럼 먹고 살 수 있을까 이런 생각 뿐이예요. 사람 인생이 길지 않은데 하루빨리 통일이 됐으면 하는 생각뿐이예요. 먹지 못하고 재명에 죽지 못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빨리 길이 열리고 남북이 소통하고 서로 오갈 수 없다면 전화통화라도 해서 친척들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요. 서로 내왕을 하면 내가 부모 묘지에라도 가서 통곡치며 울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하루 빨리 통일이 됐으면 하는 생각이예요.
현재 환갑의 나이를 넘긴 김 씨는 지난 2007년부터 남한생활을 했습니다. 노동자 집안에 태어나 예술인으로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었던 김 씨는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됐더라도 고향을 떠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김민주: 쌀문제가 제기돼서 미공급이 됐어요. 중국 친척 방조를 받으러 왔다가 방조를 못받고 도로 집으로 나가게 됐는데 이미 딸자식이 죽었고…한 달을 북한을 떠나 중국 친척을 만나자고 했는데 못 만나고 다시 북한에 가자해도 식량사정이 나쁘니까 아이 하나 있는 것을 데리고 중국에 왔어요. 그게 1999년에 벌어진 사건이예요..
그 이후 중국에서의 강제북송과 재탈북이 반복이 됐고 결국 2003년 도강을 한 것이 완전히 탈북을 떠난 계기가 됩니다. 북한에서 먹지 못해 죽어가는 자식을 볼 때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일단 하나 남은 아들을 살리자는 선택할 수밖에는 없었던 거죠.
김민주: 제가 미공급에 살길이 없잖아요. 어쨌든 자식을 살리자고 중국에 있었어요. 그때는 40대이고 거기서 타향생활 하면서 정말 힘들었어요. 농촌에서 밖에도 못나가고 밤에는 잠도 못잤어요. 중국 공안이 처들어 올 것 같아서 숨어 다니고요. 그러다가 2006년에 누가 남한으로 갈 생각이 없나 이러더라고요. 북한에 가자해도 어쨌든 북한 떠난 죄인이고 중국에 살자니 중국에서 잡아 내보내지 모든 것이 힘들기 때문에 남한생을 선택했어요.
재탈북과 중국에서의 불안했던 생활은 눈에 보이지 않은 병이 됐습니다. 언제 강제북송 당해 북한으로 끌려가 감옥에서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심장에 무리를 줬고 그런 현상은 김 씨의 신변안전 문제가 해결되면서 긴장을 늦춘 순간 한꺼번에 찾아왔습니다.
김민주: 3국에서 수술을 했어요. 뱃속에 혹이 있었어요. 한국에 와서 몸이 너무 약해서 국정원에 와서는 못견딜 정도로 아팠어요. 제가 중국에서 숨어서 7년 정도 있다보니까 심장이 못쓰게 됐어요. 심장 부정맥이 있어서 수술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뱃속에 혹제거 수술을 했는데 이듬해 또 심장 수술을 받았어요. 완전히 죽었다가 살아났죠. 한 4년 정도는 집에서 누가 밥해주는 사람도 없고 내가 해먹어야 하니까 입맛은 없고 잘 챙겨먹게 되질 않고 먹고 싶으면 대충 먹고 하니까 회복이 늦게됐지. 어쨌든 너무 힘들게 살아났잖아요.
탈북자는 제3국에서 한국행을 결정하고 기관에 인도되는 순간부터 건강검진을 받습니다. 당시 몸에 이상이 있어서 간단한 수술을 한 차례 받았는데 남한에 도착해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고 다시 큰 수술을 받았던 겁니다. 수술은 잘됐고 요양만 잘하면 정상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이 쉽질 않았습니다.
김민주: 내 가슴에는 자식이 하나 죽었잖아요. 이 행복을 혼자 느끼는 것이 가슴 아파요. 자식도 죽고 동생도 죽고 신랑도 죽었는데 나 혼자 살아서 왔잖아요. 엄마도 먹는 것을 잘 못먹고 했는데 그것을 생각하니까 먹는 것이 진짜 살로 안 가요. 내가 먹는 것을 북한의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이지 내가 행복하다고 콧노래를 부르게 안돼요.
남한생활 5년 정도를 건강을 회복하는데 썼고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외출도 꼭 필요한 때만 했고 사회생활도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불렀지만 다시 얻은 생명에도 콧노래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회생활은 거의 안해서 남한생활이 어떻다고 딱히 말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몇가지는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김민주: 북한 생활과 대비할 때 뗄걱정이 없잖아요. 가스가 들어와서 구들이 뜨뜻하지 쌀은 근심없이 많지 옷은 내가 돈이 없다면 싸구려 옷이 있으니까 사입으면 되고요. 사람이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안하면 이곳이 천국 아니예요? 먹을 것이 없어서 등짐에 장사할 것을 메고 천리길을 다니던 것 생각하면 여기는 차를 타고 다니고 하니까. 여기서는 의식적으로 건강을 위해 걷지만 북한에서는 차가 없으니까 하루 40리 정도 걷는 것은 보통이잖아요. 먹을 것 입을 것 뗄 걱정을 소금 걱정 안하니 이게 좋아요.
북한에서 전문 성악을 했다는 김 씨는 얼마 전부터 민요전문 가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제일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할 수 있어 살맛이 나는데요. 공연장을 찾는 남한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 되고 있습니다.
김민주: 처음 듣는 사람들은 무슨 노래인가 해서 신기하게 듣죠. 그러다가도 노래를 좀 들어가면 빠져요. 생이란 무엇인가, 말해다오 생소한 땅에 와서 사랑을 나누면서 뿌리를 내리는 그런 노래를 하고 그리고 꽃피는 일터는 서로돕고 이끌면서 화목하게 사는 우리 인민의 나라를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 조선사람으로 통할 수 있잖아요.
남북한 정상이 만나 음식을 나눠 먹듯 김 씨도 북한의 친지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면서 희망을 가져봅니다.
김민주: 저는 아버지 어머니가 많들어 놓은 목청에다 미모가 있잖아요. 저는 무대 나서면 정말 이뻤데요. 내가 통일 되는 날까지 남북간 통일을 위해 힘쓰고 싶고 통일을 위해 노래하고 싶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민요 가수 김민주 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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