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것이 참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북한에서 교육자 집안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중국에 가면 농사일을 도와주고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도강을 했는데 지금은 남한에 살고 있습니다. 힘든 시련의 시간이 끝나면 행복의 순간도 꼭 온다고 믿고 있는 40대 초반의 탈북여성 정문아(가명) 씨의 이야기 입니다.
-----------------------------------------------------
정문아: 어떤 일이든 하면 자꾸 새로운 세계를 접하니까 신기하고 그 방면에 또 에너지가 나온단 말이에요. 자꾸 에너지가 나와요.
지금은 모든 것에 의욕적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정 씨. 그는 2004년 중국에 가면 일당벌이를 할 수 있다는 소문에 친구와 함께 두만강을 넘습니다. 당시에 먹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도강이 위험하다는 생각조차 할 여유가 없었다고 했는데요. 20대의 세상물정 모르던 청진 출신의 순박한 정 씨는 2006년 남한에 도착합니다.
정문아: 남편이 내가 대학공부를 하겠다고 하니까 반대를 하더라고요. 남편은 애도 있고 한데 이제 대학을 다녀서 언제 돈을 버냐 하더라고요. 정착초기만 해도 지금처럼 탈북자에 대한 시스템이 잘 돼있지 않았어요. 제가 하나원에 있을 때 무슨 일을 하고 싶냐고 해서 어린이 보육교사를 하고 싶다고 했는데 상담원이 탈북자가 어린이 보육교사를 하면 그 어린이 집 망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보육교사를 하면 안되겠구나 생각을 했고 남편도 돈을 벌어야 하는데 공부하면 어떻게 하냐 일하자 이러니까 이런 것들이 중복이 되면서 나는 공부하면 안되고 돈을 벌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식당에 바로 다녔고…
남한정착 초기만 해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우선은 아이를 키워야 하는 엄마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게 됐는데요. 변수가 생겼습니다.
정문아: 갑자기 몸 상태가 안 좋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임신이더라고요. 아마 그때 임신을 안 했더라면 지금 같은 일이 아니라 다른 일을 했을지 몰라요. 반전이 있었을 거예요. 중국어는 기본적으로 글을 아니까요. 임신을 해서 식당일은 못하니까 여행사를 소개 받아서 일을 했어요. 그러다 사고가 나서 2년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됐어요.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아들을 출산을 하고는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재활치료를 받게 됩니다. 병원에서의 생활이 근 2년이 되는데요. 이렇게 여행사 일도 못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다행이 중국에서 살 때 중국말을 배운 것 그리고 남한에서 통신대학을 다닌 졸업장이 있어 무역회사에 취업이 됩니다.
정문아: 중국어 관련으로 통번역으로 출장을 가는데 중국이 워낙 크다 보니 제가 산 연변 내가 살던 곳만 중국인줄 알았는데 회사 출장 다니면서 중국 같은 큰 무대에서 뭔가 도전을 하고 싶다는 의욕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제 삶에 대해 많이 고민을 시작하기 시작했어요. 회사 다니면서 항상 고민을 했어요. 중국은 너무 넓어 너무 놀랐어 뭘 내가 할 수 있을까?
사고가 나면서 막막했는데 비가 온 뒤 날이 갠 것처럼 정 씨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정문아: 어느 정도 중국에 대해서도 알았고 중국어도 현장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까 많이 늘었고 이런 것들이 있고 나서 회사에 사표를 내고 나왔어요. 그리고 화장품 사업을 했어요. 내가 장사를 할 때 마스크 팩을 굉장히 많이 팔았어요. 내가 뭔가를 매일 깨닫는 거예요.
한국에서 물건을 떼다가 중국 남경에 가게 문을 열고 장사를 했는데 1년안에 가게를 4개나 열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부르는 것이 값일 정도로 장사가 잘됐는데요. 이렇게 벌다가는 정말 부자 되는 것은 금방이겠구나 할 정도였죠. 그런데 또 변수가 생깁니다.
정문아: 사기를 당하고 할 일도 없고 해서 아이들만 신경을 쓰자 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홍콩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를 시켰어요.
둘째는 3학년 큰 아이는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홍콩으로 유학을 결심하고 아이들과 떠났습니다. 열심히 일해 번 돈을 다 날리고는 장사는 내 길이 아니구나 싶었던 거죠.
정문아: 지금도 아이들이 얘기 하는 것이 그때 다녀온 것이 좋았고 많은 세상을 봤다고 해요. 홍콩에서 걸어서 중국을 갈 수 있는데 우리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중국과 홍콩을 오가면서 두 개의 나라를 경험했죠. 지금도 우리 아이들은 너무 가고 싶어해요.
홍콩에서는 통역과 번역 일을 하면서 게스트 하우스 즉 민박집을 운영합니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인데요. 여기서 아이들에 대한 정 씨만의 특별한 교육이 시작됩니다
정문아: 게스트 하우스를 하니까 외국인들을 많이 접촉하게 되잖아요. 한 10개국 사람들을 만났던 것 같아요. 일부러 아이들을 내보내요. 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공유해봐라 하면서 내밀었더니 처음에는 쭈삣쭈삣 하더니 다음에는 재미있는지 시키면 나가서 얘기도 하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통번역을 하는데 지금 하는 홀로그램 관련 업체에서 저를 눈 여겨 보시고는 일을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해서 그때부터 그 회사 직원으로 급여를 타면서 일을 도와드렸거든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고 뭔가 스스로 해나갈 수 있게 자립심을 키워주는 거죠. 그리고 늘 아이들과 함께 모든 일을 하면서 서서히 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정문아: 우리아이들 지독하게 학원 보내고 그렇게 안 하거든요. 어릴 때부터 뭐에 지쳐있으면 크면 하기 싫다는 것을 제가 느낀 것이 뭐냐 하면 저는 북한에서 일을 못해봤잖아요. 대학졸업하고 공장에 엔지니어로 있었지만 일은 안하고 있다가 중국에 왔잖아요. 그래서인지 뭔 일을 하면 재미있고 에너지가 막 나오는 거예요. 게스트 하우스 다섯 개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에요. 청소하는 사람도 쓰고 해야 하는데 그것이 아까워서 제가 하거든요. 손님이 많이 오면 어쩌다 한 번 사람을 쓰고 내가 하는데 아이들을 시켰어요. 엄마가 돈 버는 거 힘드니까 도와줘 이래서 아이들도 학교 갔다 오면 게스트 도와서 일을 했거든요.
주변 사람들은 정 씨의 자녀교육 방식에 고개를 갸우뚱 하지만 그는 전혀 이상함을 못 느낍니다.
정문아: 아이들에게 놀라고 해요. 그래도 큰 아이는 전교에서 상위권에 들어가거든요. 책만 읽으라고 해요. 책가지고 아침에 밥 먹을 때 얘기하고 내용 공유하고 하거든요.
아이들도 공부하라는 말을 안 들어 좋고 정 씨도 자기 일을 하면서 행복해 합니다. 이제 정 씨에게 고생은 끝난 것이 아닌지.
정문아: 예전에는 돈을 벌려는 강박관념 때문에 돈을 위해 살았다면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돼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너무 행복하고 아무리 새벽까지 일을 해도 즐겁더라고요. 그리고 항상 앞으로도 그렇지만 내 중심에 아이들이 있어요. 내가 아무리 잘돼도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하지 못하면 저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항상 아무리 회사일이 많아도 집에 와서 마무리를 하더라고 아이들에 하교하는 시간에 맞춰 집에 오거든요. 앞으로도 저는 우리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해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아이들로 성장했으면 좋겠고 저도 좋아하는 일을 찾았으니까 이 일을 하면서 쭉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인생 뜻대로 잘 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순간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정문아: 저는 새옹지마라는 사자성어를 좋아해요. 화장품 가게를 하면서 사기를 당했을 때도 차에서 자면서 그 사람을 쫓고 그랬었는데 그때 새옹지마를 생각했었어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맨손으로 왔고 처음 왔을 때 집에는 아무 것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만큼 부를 만들었고 이 이상 바닥으로 내려갈 일은 없을 거 아니냐 저는 새옹지마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그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고 또 하나는 우리 아이들이 있으니까 내가 살아있는 것만해도 감사하고 아이들이 잘되면 나는 성공한 거야. 오늘 돈이 없으면 어때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하고 건강하면 돼 이런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제 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정문아(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