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살면서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많습니다. 그 행복을 맛보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면서 사는 것인지 모르겠는데요. 오늘은 남한에 가서는 자신이 원하는 식당을 개업하기 위해 5년동안 열심히 저축해 마침내 꿈을 이룬 탈북여성 이순복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이순복: 금강산 막국수 대표 이순복 입니다. 가게는 강원도 원주시에 있습니다.
북 강원도 출신의 이순복 씨는 현재 남한에서 식당 사장님입니다. 이전과 달라진 것은 강원도지만 북한에서 남한으로 좀 내려와 산다는 차이가 있는데요. 이 씨는 북한에서도 요리사였습니다.
이순복: 제가 거기서 화식장 여기로 하면 주방장인데 군부대 806훈련소에서 화식장으로 갔을 때 고급간부들 군인 장령들 점심을 하고 아침 일찍 나가서 군인들 영양실조로 온 사람들 아침 밥먹을 때는 기름 한숟갈씩 공급하고 음식을 해요. 중환자, 군관들에게 요리를 직접하는 직업이었어요.
이 씨는 고난의 행군 시절인 1990년대 후반에 언니가 살던 청진에 갔다가 우연찮게 탈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처음에는 잠시 중국에 갔다가 돈을 벌어 다시 오자 하고 떠났던 겁니다. 그런데 계획처럼 되지 않았고 중국 공안에게 붙잡혀 강제북송이 됐습니다. 그리고 재탈북과 강제북송이라는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기자: 1998년에 첫 번째 탈북을 한 겁니까? 두 번 강제북송을 당했는데 두렵지 않았습니까?
이순복: 그럼요. 두 번째 잡히니까 내가 뭔 죄를 지었기에 나만 잡나 그런 한탄이 나왔어요. 열심히 산 죄받게 없는데 왜그런가, 가면서도 내 자신을 원망하고 그랬어요. 북한 사람이 먼저 잡힌 사람이 고발을 하는 거예요. 잡혀가면서도 보위직원 간부들에게 욕이란 욕은 다 먹으면서 가잖어요. 도집결소에 가면 제일 힘든 일을 했는데 밤이 되면 잠이 안와요. 밤이 무섭고 내일 또 그런 일을 어떻게 하나 그랬는데 그것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런 심정 몰라요.
기자: 노동단련대와 도집결소에 갔을 때 일입니까?
이순복: 단련대나 도집결소에 가면 먹는 거는 말도 못해요. 통강냉이나 다 풀어진 것을 세끼 먹으면서도 진짜 힘든 일을 하잖아요. 진짜 죽는게 낫겠다 이런 생각밖에 못해요. 그래도 내가 살아서 중국에 어린아이를 두고 왔으니까 아이 때문이라도 살아서 가야겠다고 악을 쓰고 견디고 다시 도강하게 됐죠. 탈북자들은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넌다고 합니다. 그만큼 도강이란 것이 위험한 일인데요. 이를 바꿔 말하면 그만큼 더 이상 북한에서는 살 수 없다는 절박함이 탈북인 겁니다.
이순복: 막 두만강을 뛰어들었는데 물이 한키가 넘었어요. 제가 살려고 가는데 이러다 죽겠다 차라리 가지말자 하고 다시 나왔는데 뒤에서 총소리가 나고 군견이 난리인거예요. 오늘 처음 시도고 한 번도 중국 안갔다고 싹싹 빌었어요. 또 그때부터 단련대를 들어가는 거예요. 와서 이제는 두 번 다시 잡히지 말자 하면서도…
두 번 중국에서 잡혀 북한으로 끌려 나간 경험이 있었기에 조심을 했지만 이 씨는 중국에 있을 때 남한사람에게 탈북자를 소개한 일이 있었고 그 탈북자가 공안에게 잡혀 이 씨의 이름을 대면서 다시 위기에 처했던 것이 남한행을 하게 된 계기가 됩니다.
이순복: 형부라는 사람이 저에게 전화가 왔어요. 빨리 피해라 처제가 연길에 잡혀있다. 그래서 제가 밤에 잠이 안오고 애를 두고 가려니 떼어놓을 수 없고 3일을 묵었는데 제가 브로커에게 전화를 해서 빨리 가야 한다. 이번에 잡히면 영원히 못 나온다. 차라리 빨리 한국을 보내달라고 해서 3일만에 몽골로 갔죠.
기자: 한국에 도착했을 때 느낌이 어떠셨어요?
이순복: 그때는 한국에 대해 나쁜 소릴 들었고 중국에서도 같이 가자고 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런데 저는 한국 가면 깡통차고 구두닦이 하고 하는데 뭐가 좋나 안간다고 했는데 몽골로 오는 과정에 사람들이 한국이 안 그렇다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공항에 내리는 순간 마음이 편한 거예요. 내려서 화장실에 갔는데 너무 멋있었어요. 이런 나라가 있구나 하고 그때부터는 생활을 어떻게 잘 할 수 있을까 열심히 살아야지 하고 정착할 걱정만 했어요.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요.
2007년 남한생활을 시작한 이 씨는 올해 52살입니다. 남한에 첫발을 내딛었을 당시 대학에 가기에는 좀 늦은 나이었고 중국에 두고 온 아들에게 돈도 보내야 했습니다. 우선은 누구의 도움없이 혼자 자립하는 것이 급선무였죠. 다행인 것은 이 씨에게는 요리를 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는 건데요. 망설임없이 제일 자신있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이순복: 제가 배운 것이 식당일이니까 여기저기 배우면서 일을 했어요. 집에 배치를 받은 순간 가족도 없고 혼자니까 일기를 썼어요. 그때는 월급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그냥 5년만 돈을 모으면 가게하나 차릴 수 있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일기를 쓰다보니까 열심히 살아야지 했는데 형사님이 식당을 소개해서 일을 하는데 돈을 벌고 절약해야지 하고 낮이고 밤이고 걸어다니면서 악착같이 벌어서 내 식당을 해야지 하고 맘을 먹으니까 일이 힘들지도 않고 재밌게 했는데 힘든 것이 업주들이 북한사람이라고 차별을 둬요. 돈도 적게 주고 어떤 식당가면 순복이는 퇴직금을 빼놓고 주니까 말하지 말라 이런 얘기를 주인들이 했어요. 난 5년동안 물도 가지고 다니면서 먹고 돈을 안쓰면서 차곡차곡 모아서 살았는데 5년 되니까 내 꿈이 이뤄졌구나.
절약 절약 꿈을 위해서, 이것은 이 씨가 잠꼬대처럼 뇌까리는 말입니다. 빈손으로 시작했으니 절약해 자신의 식당을 개업할 종잣돈을 마련하는 것이 급했고 그 기간을 5년이라 정했던 겁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독하게 맘먹고 앞만 보면서 달려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원하던 꿈을 이뤘습니다.
이순복: 제가 한국에 왔잖아요. 어차피 왔으면 잘살아야겠다 해서 제가 보는 것에는 절약밖에 없어요. 절약해서 꿈을 이뤄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어요. 절약해서 꿈을 이뤄야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아들도 한국에 두 번이나 왔지만 저는 아들데리고 식당을 안갔어요. 식당에서 먹으면 비싸다는 생각으로요. 그래서 지금도 아들에게 미안한 것은 한국와서 식당엘 한번도 데려가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요.
기자: 2012년 처음 가게를 가졌나요. 그때 이름하고 똑같습니까?
이순복: 네 맞아요.
기자: 2012년 자기 가게인 금강산 막국수 가게를 열고 내가 주인이다 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이순복: 그 마음이란 것은 말할 수 없죠. 이젠 5년동안 열심히 살았던 대가가 차려지는 구나. 인수를 받을 때도 누구 도움도 없이 혼자서 청소하고 혼자 꾸몄어요. 그때만 해도 형제 친척이 없으니까 가게 문을 여는 순간 화분이 하나도 안들어오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상상외로 화분도 많이 들어왔고 손님도 많았어요. 내가 이렇게 꿈을 이뤘으니까 흐믓하고 내 손님을 계속 오게 하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겠다. 음식도 정성드려 하고 재료도 아끼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많이 마음이 흐믓했어요.
35평 규모에 식탁이 14개, 종업원은 1명이었던 금강산 막국수집은 이제 문을 열고 한 곳에서 5년을 버텼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주방에 한 명, 접대원을 2명 쓰는 원주에선 나름 잘나가는 식당으로 뿌릴 내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금강산 막국수 집의 음식과 남한정착에 성공하기까지 그가 쏟은 노력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남 강원도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이순복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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