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하지만 돈주지 않아도 심지어 거부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입니다. 가끔씩 살아온 세월을 되돌아 보기도 하는데요. 오늘은 목숨을 건 탈북과 남한에서의 치열한 생활이 어느덧 10년 세월이 됐다는 평안남도 평성시 출신의 장귀화(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장귀화: 저는 학교를 갔었어요.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언어표현도 다르고 힘들더라고요.
장 씨가 남한에 갔을 때를 회상하면서 당시를 설명한 겁니다. 말이 통하는 남한에 가면 언어도 안통하는 중국에서야 보다 낫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는 겁니다. 장 씨는 북한에서 선전대원으로 생활했는데 어느날 두 번 생각없이 고향을 떠납니다.
장귀화: 신랑이 군부대 사단장 대회에 나가서 승진을 했어야 했는데 제의 토대가 나쁘다는 이유로 딸도 있었는데 저 때문에 농촌으로 추방이 됐고 당이 압력을 넣어서 결국 헤어지게 됐어요. 그러면서 난 브로커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냥 북한이 싫은 생각 한가지로 탈북했어요.
1999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부부금술이 나빴던 것도 아니고 단지 장 씨의 어버지가 6.25전쟁 중 납북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혼까지 당합니다. 그리고 도강해 중국으로 갔는데요. 가서는 바로 일을 했습니다.
장귀화: 한국분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숨어 일했는데 그래서 브로커를 만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오래 있었어요.
기자: 오래가 몇 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장귀화: 8년이요
기자: 남한사람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했다고 하셨는데 무슨 일을 하신겁니까?
장귀화: 거기가 청도였는데 농산품과 공산품이 콘테이너로 넘어온 것을 처리하는 회사가 많은 곳이었는데 액세서리 만드는 곳이었어요. 그때는 탈북자를 신고하면 중국 인민폐 300원을 줬는데 교포가 신고를 해서 잡혀 강제북송돼서 함흥 보위부 감옥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저는 8년째 되는 해에 청진보위부 사람들이 외화무역을 하면서 시장을 훑고 다닐 때였어요.
2000년 2월 중국에서 남한행을 할 당시 상황을 얘기한 겁니다. 장 씨도 자칫 공안에게 잡혀 북송 될뻔한 위기 상황이었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지인의 소개로 브로커를 만나 남한행을 하게됩니다. 사실 탈북해 중국에 가서는 말이 안통하기 때문에 조선족 집에가서 농사일을 하거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는 것이 흔한 일인데 장 씨는 공장에서 단순노동이지만 임금을 받고 일해서 생활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중국에서의 생활 계속 들어보죠.
장귀화: 한국분이 운영하는 회사라도 직원은 중국교포였고요. 사장님하고 사장님을 돕는 여자분이 한국분이었어고 나머지는 다 중국 교포였어요. 그때는 남한이 잘살고 너희가 생각하는 남한이 그런 나쁜 나라가 아니다라고 했지만 그말을 믿지를 않았어요. 남한 드라마를 보고 남한 노래를 부르면서도 북한식으로 생각했어요. 북한처럼 영화를 찍기 때문에 좋은 곳만 내보낼 것이다 라고 생각했어요. 오래 있으면서도 못 믿었어요.
기자: 중국에서 신분도 없는데 한 번 가보자 이런 생각도 안해보셨나요?
장귀화: 목적은 한국을 가겠다 하고 떠났는데 중국에서 한국 텔레비전 방송 보고 사장님 말을 들었어도 그것을 믿지 못했었다는 얘기죠. 결국 못 믿었었죠.
기자: 8년이란 세월을 결정을 못했다는 말입니까?
장귀화: 결정을 못했던 것이 아니고 그 여자 사장님이 발이 넓지 못하니까 우리가 브로커를 빨리 만나게 해주질 못했어요. 그리고 딸이 잡히다 보니까 사장님은 더 우리를 숨겨주는 식으로 했거든요. 오기 싫어서 오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한국행 브로커를 못 만나서 빨리 오지 못했던 거예요.
중국에서 남한에 가는 것도 신분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정상적인 방법을 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한행을 안내하는 브로커를 통해야만 갈 수 있었고 일반인이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북한 상무들이 장 씨가 사는 곳 일대에 퍼졌고 딸마저 붙잡혀간 상황에서 언제 자신도 위험에 처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남한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남한 땅을 밟은 순간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장귀화: 저는 한국에 온지 10년이 됐는데 가장 충격적인 것이 그 나라가 싫어 떠났지만 세뇌된 것은 어쩔수 없더라고요. 저는 남한에 도착했을 때 혼자 감격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북한에서 남한에 대해 강도가 많다는 나쁜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오면서 보니까 길거리 사람이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이 편안하고 평화로운 느낌이고 마주한 사람이 저희를 대하면서 반갑습니다. 잘오셨습니다 하고 말하는 한국 사람들의 눈길이 너무 부드러운데 대해 충격을 받았어요.
40대 중반이 돼서 말로만 듣고 상상하던 남한땅을 밟았을 때 기억입니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나도 그런때가 있었지 하고 살지만 처음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답니다.
장귀화: 한국에 들어선 순간 한국의 잘사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어요. 하나원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짧은 시간 모든 것을 이해할 수가 없더라고요. 집을 배정받아서 왔는데 저는 오다가 잃은 딸 생각이 났어요. 이제는 숨어살지 않아도 되고 하는 편안한 곳에 데려오지 못한 딸 때문에 많이 울었고 빈집에 들어서니까 도우미들이 날 도와주는 것에 감사한 생각에 울었는데 한달 돼서는 어떻게 적응을 해야할까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언제나 위기의 순간에는 좋은 사람이 나타나 장 씨에게 도움을 줬는데요. 남한행을 주선했던 분을 만나 직장을 소개받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나왔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실정이 어두워 먼저 뭘 알아야 일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찾아간 곳이 학원입니다.
장귀화: 탈북자는 한국에 오면 공짜로 교통비를 주면서 배워주는 학원이 있는데 거길 안가고 한국을 알려면 한국 사람들과 섞여야겠다는 생각에 한 달에 32만원을 돈을 내고 세무회계 학원을 갔어요. 거기 가서 8개월을 공부했어요. 그리고 나와서 바로 단체를 만들어 활동을 했고 직장은 안다녔어요.
장 씨가 말하는 단체란 탈북민들이 모여 공연을 하는 북한예술단입니다. 자신이 제일 자신있게 할 수 있는 것이 노래와 춤이라 고향사람들을 조직해 활동을 하게된 겁니다. 그런데 보통 탈북자들이 처음 가는 학원이 컴퓨터를 배우는 곳인데 장 씨는 달랐습니다.
기자: 선전대에 있었는데 왜 생소한 분야인 세무회계를 공부하셨나요?
장귀화: 총무를 맡았는데 거기서 내가 너무 모르니까 자존심이 상했고 순간적으로 생각난 것이 여기선 배우지 않고선 설자리가 않겠다 했죠. 한국을 알기전에는 어디서도 내 설자리가 없다는 생각에 학원을 갔던거죠.
지인이 소개했던 곳에 한 두달 일하다가 나와서 찾은 곳이 세무회계 학원이었습니다. 돈이 돌아가는 것을 알자면 우선 그런 것의 기초가 되는 세무회계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장귀화: 총무니까 어디가서 영수증을 붙여야 하고 사무실에 임대료, 물세 이런 것이 나왔는데 앞이 캄캄하더라고요. 우리는 임대 아파트를 받았는데 집에도 한 달에 한 번씩 관리비, 임대료가 나오는 것이 나는 적응이 안됐거든요. 그때 생각했던 것이 배워야겠다. 이런 생각에 세무회계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오늘은 장귀화 씨가 탈북해서 남한에 도착했던 초창기 상황을 들어봤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그 후 10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 변화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평안남도 평성시 출신의 장귀화(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