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고향을 떠난 지 십 수 년이 훌쩍 넘어버린 탈북자들이 남한에는 많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지난 2004년 윁남(베트남)에서 남한행을 기다리던 480여명의 탈북자가 한꺼번에 비행기 두 대로 남한으로 간 일이 있습니다. 이들 탈북자들은 이제 남한생활 10년이 되는데요. 오늘은 당시 남한에 간 탈북여성 김은혜(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은혜: 나는 그래요. 보지 못하니까 안타까워서 그러겠지만 북에 있는 가족들 죽지 말고 살아있기를 간절히 빌고 내가 성공해서 만나고 싶고 무엇이든 잘되기를 소원하죠.
평양 출신의 김은혜 씨는 90년대 말 탈북해 중국 생활을 거쳐 남한으로 가기 위해 중간 기착지인 윁남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또 다른 3국으로 옮겨갔어야 했는데 워낙 탈북자들이 많아 정체 현상이 심했던 거죠. 윁남은 사회주의 국가로 남한과 북한의 대사관이 있는 동시 수교국이라 잡히면 안 된다는 불안함도 적지 않았지만 지내기에 불편함은 없었습니다.
김은혜: 우리가 베트남에 있을 때는 대우를 잘 받았어요. 사장님이 호텔을 운영하던 분인데 방에 침대를 다 치우고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았어요. 거기에 한 120명이 있었는데 나중에 방이 없어서 복도나 휴게실에서 자는 사람도 있고 했어요. 먹는 것은 잘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50명이었는데 먼저 온 사람들이 빠지질 않아 그 수는 계속 늘었고 120여명이 한 건물에서 생활하자니 항상 건물 안은 북적거렸습니다. 탈북자들을 돌보던 남한 주인을 사장이라고 불렀는데 이 사장은 많은 사람이 지루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도록 항상 신경을 써줬습니다.
김은혜: 컴퓨터를 배워 줬어요. 인원이 많으니까 칠판에 자기 순서를 정해서 한사람이 한 30분씩 시간을 맞춰서 워드를 배워줬어요. 그리고 책이 많으니까 책 읽는 사람도 많았고요. 안에서는 자유예요. 밖에는 나가지 못하니까 안에서 책도 읽고 남한 드라마나 영화도 보고 지루하면 어떤 사람들은 화투도 치고...
남한정부는 전세기 두 대를 동원해 당시 윁남에 있던 탈북자들을 모두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탈북자 지원정착법에 따라 모두에게 임대 아파트를 주고 정착금 지급을 합니다. 김 씨도 서울의 중심에 있는 아파트를 받게 됐는데 첫날 집에 도착해서는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김은혜: 평양에 있을 때는 집은 컸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나는 집에 들어오니까 집이 너무 작은 거예요. 집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며칠을 펑펑 울었어요. 괜히 서럽고 이제는 메인 몸이 아니고 자유로운데 성공해서 이젠 한국에 왔구나 하는 복합적인 감정이 있었어요. 북에 두고 온 가족 생각, 아빠 엄마 동생들 생각에 울었어요.
2000년 중반까지 탈북자가 임대주택을 받아 지역사회에 편입되면 당장 생활할 수 있는 생활필수품은 종교기관에서 마련을 해줬는데요.
김은혜: 하나원에 있을 때 후원받은 밥가마, 이부자리, 그릇, 수저는 있는데 기본 살림은 없었어요. 그러니까 하나하나 사야해요.
기자: 돈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구입을 했습니까?
김은혜: 브로커 비용을 지불하니까 돈을 없죠. 먼저 온 친구들 교회 사람들 형사님이 집에 있는데 도와주더라고요.
기자: 얼마 동안이나 도움을 받았나요?
김은혜: 처음에는 몇 달 정도 일주일에 며칠 정도 정기적으로 와서 도와주시고 형사님은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지하철은 어떻게 타고 은행은 어떻게 이용하고 마트에서 물건 구입하는 방법을 다 알려주더라고요.
기자: 당시 브로커 비용은 얼마나 줬나요?
김은혜: 우리 나올 때는 300만원을 줬는데 하나원 나오니까 밖에 서 있더라고요.
남한 돈 300만원이면 대략 2800달러 정도 됩니다. 이때만 해도 브로커 비용이 지금 보다는 쌌는데요. 처음 받은 돈을 전부 브로커에게 전하고 나니 또 빈손이 됐습니다. 그리고 정부에서 혼자 경제생활 능력을 가질 때 까지 주는 돈으로 생활합니다.
김은혜: 2년 동안 수급자로 돈이 나와요. 그 돈으로 생활 했죠. 그리고 그 돈으로 필요한 것을 사기 시작했죠. 텔레비전을 먼저 사고 가구는 비싸니까 나중에 사고 주민등록증 나와서 전화기 사고 또 난 음악을 좋아하니까 녹음기 사고, 전자기기, 가정도구, 옷, 화장품... 사무직에서 일했는데 처음에 한국에 오니까 컴퓨터를 다를 줄 아니까 조금 배워서 했죠. 월급을 타는 날이 제일 좋더라고요. 한 달 월급이 150만이라 좋았어요. 수급자로 있을 때는 40만 원 정도 나왔는데 월급을 받으니까 너무 좋더라고요.
직장을 잡고부터는 일한만큼 보수를 받으니 생활이 한결 나아집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남이 쓰던 물건을 받아썼던 것들을 전부 새것으로 장만하고 행복해 합니다.
김은혜: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냉장고, 밥가마를 월급타고 다 샀어요. 그리고 다음에 월급 탓을 때는 저축을 했어요.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죠,
탈북해서 북송 당하고 또 재탈북하고 이런 과정에서 김 씨는 북한에 잡혀가 감옥 생활을 하면서 보이지 않은 내상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멀쩡한데 몸 안이 망가졌다는 거죠. 그래서 잠시 다니던 직장도 못 다니게 되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됩니다.
김은혜: 머리가 많이 아팠어요. 머리가 아프니까 먹지도 못하고 열이 나고 몸이 떨리고 해서 아무 것도 못하겠더라고요. 병원에는 탈북자라 1종이라 거의 무료잖아요. 그래서 치료는 잘 받았어요.
기자: 병명이 뭐였나요?
김은혜: 특별한 것은 없는 데 난 아팠어요. 나중에 MRA를 찍었는데 신경성이었고 혈관이 조금 터졌더라고요. 한방 치료도 받았고요. 한국에는 병원이 워낙 많으니까 여기저기서 치료 많이 받았어요.
이제 김 씨는 남한생활 10년차가 됩니다. 그러는 사이 나이는 50줄에 접어들게 됐는데요. 비록 눈에 보이게 갖은 것은 없지만 총화다 토론회다 해서 동원되는 일도 없고 간섭하는 이가 없어서 맘은 편하게 산다고 했습니다. 이제 다시 밝은 새해. 2014년은 묵은해 보다 좋은 일만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김은혜: 처음에는 새해가 되면 설레고 북한에 있는 가족 생각에 서럽기도 하고 했는데 이젠 나이도 있고 한국 생활이 10년 되니까 무덤덤해지더라고요. 해가 가나보다 또 새해가 왔나? 조금 무덤덤해지는 그런 것도 있어요. 아마 긴장이 다 풀려서 그런지...성공을 해야 하겠는데 ...제일 부러운 것이 가정을 이뤄서 주말이면 차타고 어디든 여행가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과 능력이 되면 여행 다니고 좋은 것 먹고 좋은 보고 그런 거 하고 싶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김은혜(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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