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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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건강하게 잘사는 겁니다. 물론 물질적인 풍요도 누리고 게다가 명예까지 얻는 다면 좋을 겁니다. 우리는 보통 이런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을 성공했다고 하는 데요.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 때 온 가족이 탈북해 남한에서 성공한 김영남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영남: 3년은 힘들었던 것 같아요.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 그리고 자릴 잡아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41살에 낯선 남한에 도착해서는 빈손으로 새로 시작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컸습니다. 하지만 목숨 걸고 찾은 남한 땅에서 꼭 멋진 인생을 살겠다는 마음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김영남: 한국에 2002년에 와서 우리는 좀 급하잖아요. 자아실현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도 하고 물질적 자립도 해야 하는 것이 1차 목표거든요. 우리 때문에 지인들은 북한에서 감시도 당하고 불이익도 당하는 데 저희가 여기 와서 잘살고 해야지 도울 수 있잖아요. 3년동안은 굉장히 갈등이 많았습니다. 예술단을 2005년에 시작하는데 많이 힘들었어요. 초기 자금이 5천만원 정도 들거든요. 차도 있어야 하고 의상도 한 벌에 30만원 정도 하면 50벌을 만들자면 1,500만원입니다. 그리고 음향설비도 갖춰야 하고 연습장도 가춰야 하고요. 제가 2002년 받았던 정착금을 다 털었습니다.

북한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해 청년예술단 단장으로 활동했던 김 씨는 남한에서 예술단을 조직합니다. 기존에 활동하는 탈북자들의 공연단과는 다른 차원의 공연을 남한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소위 말해서 잘되면 대박이고 잘못되면 쪽박을 찬다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김영남: 평양예술단을 운영하는데 정말 고생많이 했습니다. 이북에서 오신분이 기량이 뛰어난 분도 있지만 부족한 분도 많잖아요. 여기와서 사회적 기업까지 최대로 올릴 수 있는데 까지는 끌어 올렸어요. 우리 예술단 공연을 보고는 금강산 관광가서 보면 북한예술단 공연을 보는데 그것 못지않게 잘한다고 했어요. 실제 우리 평양예술단이 평영에서 온 줄 알고 착각할 정도로 기량을 올렸어요. 10년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지금은 아코디언 쪽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는 상황입니다.

평양예술단은 10년 동안 1,500회 공연을 했다고 했습니다. 예술단을 꾸린지 3년만에 투자금은 모두 회수할 수 있었고 그 다음부터는 공연하는 데로 수입이 됐는데요. 성공의 비결이라고 한다면 북한식을 남한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치지 않고 남한사람들의 정서에 맞게 재창조하는 작업을 했던 겁니다.

김영남: 처음에 좀 어려움이 있었는데 시대착오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서 남한음악을 하는데 여기분들이 들었을 때는 남한 냄세가 안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아코디언을 하는 분들이 수준이 좀 떨어져요. 그러다보니까 저는 화음 만들고 기교는 있기 때문에 어찌됐든 이북식을 쳤다고 해도 처음에는 통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 문화를 이해하고 남한 음악을 알게 되니까 챙피하더라고요. 지금은 자신있습니다. 남한은 가장 많은 것이 트로트입니다. 그리고 왈츠, 탱고를 좋아하는데 제일 좋아하는 것은 트로트 입니다. 북한사람들은 연주를 좀 딱딱하게 하는데 여기 분들은 부드럽게 해요. 지금은 여기분들보다 제가 잘하기 때문에 부드럽게 이어주면서 차분하게 다 접목해서 연주를 하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아코디언 자신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보통 보면 귀가 얇은 사람은 성공하기 참 힘듭니다. 남들이 하는 말만 믿고 이리저리 휘둘리다 보면 몸상하고 마음까지 다쳐서 빈털터리가 되기 쉽상인데요. 그런 면에서 김 씨는 현명했습니다.

김용남: 그때 느낀 것은 뭔가 하면 내가 북한에서 음악했던 것이 여기와서 통하겠나 하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북에서 했던 것을 가지고 여기서 다시 되살리기하니까 정착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자기가 하고 싶고 제일 잘하는 것을 개발하니까 성공하는데 지름길이 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자신이 좋아 하는 일을 했지만 경제활동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고정수입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코디언 음악학원을 합니다. 서울 중심가에 악기점이 모인 곳에 작은 공간을 빌려 사람들을 가르친 겁니다.

김영남: 종로인데 거기는 월세 내고 하는데 단체로 하기 보다는 개인강습을 기본 했습니다. 30분씩 1시간 씩 했는데 제가 잘하는 분야라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2002년 한국에 왔을 때는 북한식으로 한다고 해서 테크닉을 쓰면서 클레식인데 그런 쪽으로 했습니다. 남한문화를 몰랐었죠. 그래서 평양예술단 활동을 하면서 남한문화와 음악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남한문화를 이해하고 제것으로 만드는데 10년정도 걸린 것 같아요.

남한생활 17년이 항상 꽃길만은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위기의 순간도 있었고 선택의 기로에서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김 씨가 오늘의 위치에까지 도달하는데 몇가지 사실은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점이 있습니다.

김영남: 항상 긍정적인 마음만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부정적이지 않고 열린마음으로 내가 열심히 정칙하게 성실하면 된다. 남한에도 나쁜 사람도 있지만 내가 느낀 것은 열분 중 아홉은 좋은 분입니다. 나쁜 사람은 상대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신용을 지키고 열심히 사니까 나중에는 그 사람들이 다 나를 도와줬기 때문에 내가 오늘날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북한에서 그리고 남한에서 음악과 쭉 함께한 인생. 남한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관적인 관점이 아니라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됐습니다.

김영남: 100만달러 있으면 중산층으로 보더라고요. 미국이 100만달러 가지고 있는 사람이 1,500만명이 있고요. 한국은 74만명이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한국에 와서 17년 만에 자산 100달러에 들어갔습니다. 그것도 무시 못하는 것이 그만큼 남한에 와서 내가 헛살지 않았다. 여기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하고 직업도 가질 수 있겠지만 경제적인 축복도 같이 누릴 수 있다. 저는 한국에서 물질과 명예를 다 가질 수 있게 됐다고 확실히 자부할 수 있습니다.

올해부터는 더 시간을 쪼개서 활동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아코디언 연주를 하면서 얻은 명성으로 대학교수직 요청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금 더 일찍 대학에서 전문인 양성을 위한 일을 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입니다.

김영남: 일단 준비가 돼있어야 기회를 잡을 수 있거든요. 저도 아코디언을 열심히 가르치고 책도 쓰고 하다보니 교수직이 오지 않았나 봅니다. 연세디지털 교육원에 교수가 됐는데 4년제입니다. 북한에서 온 학생과 남한사람을 가르치게 됐는데 열심히 가르쳐서 기초를 쌓고 그분들이 세계로 나아가는 데 제가 기여하고자 맘 먹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아코디언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남 씨의 남한생활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