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게 오래 살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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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아무리 준비를 잘한다 해도 낯선 지역으로 이주해 산다는 것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물며 목숨을 걸고 탈북해 남한에 간다는 것은 인생을 걸고 할 수 있는 단 한번의 선택인 것인데요. 오늘은 온 가족이 탈북해 항구도시 부산에 정착한 김금춘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금춘: 고향은 제가 중국입니다. 중국에서 1969년에 결혼을 하고 1974년에 북한에 갔습니다.

중국에서 태어나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학업을 이어가려는 남편을 따라 북한으로 간 김 씨. 3년간 화교 생활을 하다가 북한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함경남도 홍원군에 새 터전을 마련하고 식료품 공장에서 일합니다.

1980년대에는 배급이 나왔고 중국에서 사는 것보다 북한에서의 생활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 이후 북한 경제가 붕괴되고 '고난의 행군 시절'로 접어들면서 살길이 막막해집니다. 그래서 중국에 사는 친척의 방조(도움)를 받아 살게 되는데 그것이 문제가 돼서 살던 집마저 내놓게 됩니다.

김금춘: 제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 국토부에서 집을 내놓으라고 해서 집을 내놓고 어디 갈 곳 없고 그래서 산에 올라가 뚝막을 해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군당에서 밤에 돌아다니면서 외화사업을 했는데 나를 보고 "김 동무 어떻게 여기 와서 있는가? "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군당 조직부 지도원이 당장 다음날에 식료품 공장 초급당 비서를 올라오라고 해서 빨리 집을 해결해주라고 …

모두 어려운 때 먹을 것 걱정이 없던 김 씨를 주위에서 간첩 혐의로 보위부에 거짓 밀고를 한 겁니다. 하루 아침에 가진 재산과 집을 모두 뺏기고 산에 들어가 6개월을 살았던 김 씨. 먼저 탈북한 남편과 연락이 닿아 남한행을 합니다. 그리고 지난 2004년 무사히 새로운 인생2막을 시작합니다.

김금춘: 저는 그랬습니다. 한국이 이렇게 발전했는데 열심히 나가서 아파트 관리소 일자리라도 찾아서 일하자고 했는데 아이들 셋 다 회사생활을 잘하고 남편이 자원봉사 일을 하고 저는 그에 대해 적극 옹호하고 지금도 아이들이 일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있어서 저는 매우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김 씨에게는 3명의 딸이 있습니다. 모두 20살을 넘기고 남한 생활이 시작됐는데요. 공부할 기회를 놓치고 경제활동에 뛰어듭니다.

김금춘: 대학 가라는 말은 못했어요. 우선 자식이 있다 보니 먹고 살고 자기 사는 문제부터 해결하다 보니 공부를 못했죠. 그런데 큰딸이 이번에 대학 공부를 하겠다고 해서 남편이 적극 지지해 주고 해서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기자: 막내 딸은 대학공부를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던가요?

김금춘: 와서 인차(곧) 시집을 가서 아이가 있고 막내도 결혼해서 아이가 있고 해서 큰손자가 14살입니다. 손자손녀는 이제 공부를 제대로 시키려고 합니다.

남한생활은 해가 바뀌었으니 이제 17년이 됩니다. 언제 세월이 그리 빨리 갔는지 놀랄 정도인데요. 그래도 가족이 모일 때면 북한 고향에 살던 때 이야기를 한답니다.

김금춘: 북한에 있었으면 벌써 다 죽었을 겁니다. 최근에도 우리가 앉아서 밥 먹으면서 얘기를 했는데 "우리 북에 있었으면 다 죽었지?" 그러니까 큰딸이 "내가 제일 먼저 죽었을 거예요." 이렇게 웃으면서 얘기 하고 그랬습니다.

기자: 큰 딸이 제일 고생을 했나 보군요? 몸이 약했나요?

김금춘: 큰딸은 북한에서 쌍둥이를 낳고 먹을 것 없고 장마당에 나가서 하루 종일 일하고 했는데 몸도 안 좋고 했어요. 다행히도 그때는 아빠가 있었으니까 괜찮았는데 아빠가 떠나고는 어디서 누가 먹을 것을 갖다 줍니까? 그러니까 죽을 길밖에 없었죠. 그런데 이 길을 선택해서 오다 보니까 여기 와서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올해 75살이 되는 김 씨는 북한에 살았다면 지금 어떤 생활을 하고 있겠는가 하는 기자의 질문에 허탈해 합니다.

김금춘: 일자리가 있어야 일도 하고 하죠. 또 일을 해도 북한에는 노임이 없었습니다. 저도 28년 동안 식품공장에 일했어도 퇴직금도 못 타고 노임도 몇 년째 못 타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대부분 은퇴해 제 2의 인생을 사는 나이에 시작한 남한생활에서 김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부모로서 딸들의 생활을 도와야 했고 부지런함이 몸에 베어있는 김 씨는 무슨 일이든 했어야 했습니다. 당시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 집니다.

김금춘: 처음에는 우리가 남한생활에 정착을 못하니까 어디 가면 저 사람은 탈북자다 하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이 안 좋더라고요. 저도 처음에 와서 찜질방에서 1년 반을 일했습니다. 그런데 찜질방이란 곳이 너무 온도가 높고 그러니까 남한 사람들이 들어가서는 최고 많이 일한다는 것이 한 달을 못 버티고 나온다고 해서 내가 도대체 어떤 일인가 하고 가봤습니다. 가보니까 역시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생각을 한 것이 내가 여기 와서 먹을 것이 없나 입을 것이 없나 내 있는 힘을 발휘해서 해보자고 결심을 하고 열심히 하다 보니까 사장도 저의 노임도 올려주고 그랬습니다.

남한생활을 하면서 나이 탓인지 아니면 북한에서 힘들게 살아서인지 건강이 안 좋아 위험한 고비도 많이 넘겼습니다.

김금춘: 건강은 이제 나이도 많은데 그런가 해야지 더 안 아프면 되지 않습니까. 지금 상태는 괜찮습니다.

기자: 몸이 많이 안 좋으셨던가 보죠?

김금춘: 아팠을 때 저는 죽는가 이렇게 생각했는데 나라에서 다 항암 주사를 놔주고 살려 주니까 너무 감사합니다.

기자: 지금은 연세가 드셔서 일은 안하고 계신데 주로 집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십니까?

김금춘: 집에만 안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 때문에 어디 못 다니고 하는데 코로나 없을 때는 친구들과 다니고 싶은데도 많이 다니면서 생활을 했습니다.

기자: 동네 노인정 같은 곳도 다니고 그러시나요?

김금춘: 거기는 안 가고 자식들이 일하고 공부하고 하니까 아이들 도와도 주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남한 생활 중 가장 기뻤던 일 중 하나는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 일본에 갔던 겁니다.

김금춘: 우리 큰딸이 엄마 아버지 수술도 하고 했으니 한 번 여행을 시켜 준다고 해서 일본 갔었고 또 2년 있다가 일본을 다시 다녀왔습니다.

기자: 외국 여행 갔던 것이 제일 좋으셨군요?

김금춘: 그렇게 다른 나라로 어디든 자유스럽게 다니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북한에는 어디를 가자고 해도 증명서 서류요 뭐요 다 서류가 있어야 되는데 여기는 여권 하나만 있으면 어디든 가지 않습니까?

기자: 코로나 19비루스(바이러스)때문에 외출도 자유롭게 못하고 힘드시죠?

김금춘: 저는 지금 코로나 때문에 학생들이 학교를 못 가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코로나가 없으면 학생들이 마음껏 활기차게 나가서 공부하고 서로가 소통하고 나도 코로나가 없으면 어디 가고 싶은 곳을 다니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집에만 있으니까 너무 안타깝습니다.

빨리 모든 이가 활기차게 정상 생활을 되찾기를 바란다는 김금춘 씨. 그래도 남한에 사는 것이 또 이 순간이 소중하게만 느껴진답니다.

김금춘: 저는 남한에 와서 먹을 것 입을 것 서로가 소통하고 서로 나눠 먹고 서로 곤란한 일이 있으면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 것이 저에게는 남한에 와서 제일 좋은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함경남도 홍원군에 살던 김금춘 씨 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