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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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청소년 때 탈북한 북한 주민은 남한에 가서 대학생이 됩니다. 북한에서는 막연한 꿈이고 희망이었던 대학진학을 하는 거죠. 이들은 일하며 공부하고 당당한 사회인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오늘은 윤정희(가명) 씨의 남한생활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윤정희: 죽어도 밖에서 죽어라. 이집에는 다시 들어올 생각 마라. 다시 들어와도 너희 먹을 것 없다 이런 거였죠.

함흥에 살던 윤 씨는 엄마의 말을 듣고 오빠와 함께 탈북 합니다. 그렇게 화를 내는 사람이 내 친엄마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상황이 절박했던 겁니다.

윤정희: 거의 입에 풀칠도 못할 정도였죠. 집에 있어봤자 너희에게 줄 것 없다고 배불리 먹일 것 없다고 살려면 그냥 가라고 돌아오지 말라고 했어요. 북한에 교통도 안좋고 했잖아요. 가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다시 돌아올까봐 그러셨을 거예요. 당시에는 그것을 이해 못하고 …

지난 1997년 1월 이었습니다. 이렇게 윤씨 남매는 압록강을 건너 낯선 중국 땅에 도착합니다.

기자: 먹을 것이 없으니 엄마가 나를 내치는구나 버리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이셨나요?

윤정희: 아니요. 그건 아닌데 너무 모질다. 너무 매정하다는 약간의 원망은 있었죠. 그래도 14살밖에 안되는데 가다가 교통이 안좋고 하니까 도중에 돌아올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까지 모질게 했을까 생각했죠. 어린 나이고 철도 덜들었고 하니까 엄마의 깊은 뜻을 이해 못했고 슬쩍 원망도 있고 일단 내가 가야하는구나 먹고 살길을 찾아 가야하는구나 했지만 머리 속이 반반이었던 거죠. 엄마가 우리 굶어 죽일까봐 이렇게 하는구나 하면서도 저 정도로 말할 필요까지 있었나 하는 상처는 받았죠. 그런데 그 당시에 엄마에게 표현하거나 그런 것은 없었고 ….

윤 씨의 엄마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길이란 점을 무섭게 화를 내서라도 아이들이 깨닭았으면 하는 절규의 몸부림을 쳤던 겁니다. 탈북은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되는 일이었으니 신경을 잔뜩 쓸수밖에 없었습니다.

윤정희: 사람들 눈을 피해 초저녁에 해가 지고 나왔다가 기차역에서 기다리다가 기차가 연착이 됐던지 해서 늦은 시간에 집에 다시 들어왔었어요. 그런데 그때 엄마가 화를 내면서 가야지 왜 집에 다시 들어왔냐고 두 번다시 이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요.

기자: 기차 타고 한참가서 강을 건너는 거였군요?

윤정희: 저희는 국경 쪽에 아니었고 함흥이라는 큰 도시여서 안쪽이었거든요. 국경까지 가려면 교통이 좋을 때였어도 이틀은 가야했어요.

기자: 초행길을 오빠와 가는 것이었군요?

윤정희: 혜산까지는 오빠하고 몇 번 갔던 적은 있어요. 그런데 혜산에서 국경쪽에서 강을 건너는 것은 완전 초행이었죠.

힘들게 도착했던 중국에선 13년을 살았습니다. 중국에서의 세월을 한마디로 말하는 단어는 서럽다 입니다.

윤정희: 항상 불안감으로 살았거든요. 남들은 13년 살았다 하면 고향이나 마찮가지네 이렇게 말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남한에 오기까지 똑 같은 심정이었어요. 길나가면 공안복 입은 사람 보면 피하고 싶고 무섭고요. 솔직히 한국 와서까지도 거의 매일밤 꿈에서 도망치거나 북한에 잡혀가서 고문당하는 이런 꿈이나 아니면 현지에서 중국공안에 잡히거나 아무튼 계속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꾸면서 살았거든요. 불안감으로 살았고요. 그리고 공부를 못 하잖아요. 지식이 없다보니까 아무리 내가 모든 면에서 잘하고 싶어도 일단은 중국 아이들 앞에서는 자신감이 떨어지고 몸을 움직여서 돈을 벌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겠구나 하는 마음이었어요. 한마디로 슬픈 나날이었어요.

탈북해 낯선 중국에서 좋은 기억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지난 2011년에 남한에 갔는데요. 그때 윤 씨의 나이는 28살이었습니다. 다시 새로운 땅에서의 생활이 시작됩니다. 모든 남한입국 탈북자가 거치는 사회정착교육 시설인 하나원을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남한사회를 알게 됩니다.

윤정희: 솔직히 중국에서도 한국분이 하는 식당에서 일했고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에 대해서 좀 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무섭거나 그런 느낌이 없었어요. 그런데 사회에 정착하면서 느끼는 것이 내가 그 전에 봤던 것은 드라마일 뿐이었고 한국에 대해서 알고 온 것이 아니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솔직히 한국 생활이 우리한테 만만치는 않았던 것 같아요. 북한에서 중국에 왔을 때는 철없을 때 왔으니까 기억이 별로 없는데 중국에서는 거의 성인이 돼서 갑자기 한국에 왔는데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너무 사소한 것이었고 한국에 딱 오니까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자 해도 모든 것이 생소한 거예요. 나는 한국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고 왔는데 그것이 아니니까.

정신없이 남한사회을 알아가는데 3년정도가 걸렸습니다. 제일 좋은 것은 나가서 일하며 사람들과 몸으로 부딪쳐서 사회를 배우는 거였습니다.

윤정희: 내가 아는 것은 너무 작고 내가 해야할 것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 많더라고요. 일을 조금 하다가 솔직히 기분이 나빴던 것이 식당같은 곳에 가서 면접을 보는데도 대화를 하다보면 억양이 여기사람 아니네요. 이러는 거예요. 한국에 와서 내 신분을 숨기고 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북한에서 왔다고 당당하게 얘기 하고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시급도 낮추고 그래도 할꺼냐고 하고 사람들이 말을 못 알아들으면 싫어한다 이런 식으로 말이 바뀌더라고요. 그래서 잠깐 알바를 하다가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역시 미래를 위한 가장 좋은 투자는 공부였습니다. 그래서 꿈에 그리던 대학을 입학을 위한 준비를 합니다.

윤정희: 저는 검정고시를 봤죠. 북한에서 중학교 중퇴로 돼있으니까 한국에서는 초등학교만 인정을 해주더라고요.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를 봤고 바로 대학에 갔죠

기자: 대학입학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습니까?

윤정희: 시간은 약 1년반이요. 검정고시를 1년 안에 중고등 과정을 다했어요.

기자: 그리고 대학은 4년제를 들어가셨나요?

윤정희: 네, 대학에서 중국어 통번역 과를 했어요.

현재 윤 씨는 건강상 이유로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하고 있는데요.

윤정희: 처음에는 많이 설레이고 교실에 앉아있는데 나밖에 안보이는 거예요. 기분도 억수로 좋고 성취감이 너무 컸는데…

기자: 수업을 따라갈 수는 있던가요?

윤정희: 네, 일단 저는 필기를 열심히 해요. 그리고 교수님 강의가 어렵다고 생각되면 녹음도 하고요. 그리고 진짜 이해가 안간다 싶은면 같은 수업을 하는 학생들에게 물어봐요. 나이많은 언니가 같이 공부하니까 궁금할 테니까 북한에서 와서 공부하고 싶어서 하는데 모르는 것이 많이니 도와줘 하고 말해요.

매일 도전하는 삶을 사는 윤 씨는 대학생으로 그리고 사회인으로 대학 과정을 마치기 위해 복학할 예정입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윤정희(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