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사람이 위기 상황에 빠지면 현실을 외면하거나 미리 포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힘들 때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쪽 문이 열린다는 말을 믿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 밝은 해를 볼 수있듯 용기를 조금만 더 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절망을 딛고 일어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양천구 구청 공무원 김혜성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김혜성: 녹녹치는 않았어요. 이제와서 보면 그때 하늘이라는 것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땅만 보고 살았어요.
지금은 가볍게 얘기할 수 있지만 남한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당시에는 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람사는 세상 뭐 특별할 것도 없을 것같은데도 말입니다. 북한에서 떠날 때와는 또 다른 상황이었는데요.
김혜성: 고향을 떠날 때는 사실 내가 고향을 떠난다는 생각을 못하고 떠났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1년사이로 돌아가시고 오빠가 군 마치고 돌아왔는데 아무것도 없었어요. 오빠가 대학 추천을 받아서 왔는데 단돈 1전을 못쥐어줬어요. 밥도 못해주고요. 그러던 차에 저희집에 자주 와서 밥을 잡수시던 분이 중국에 고사리를 꺽어서 팔면 돈벌이가 잘된다고 말하더라고요. 한달만 고사리 꺾어서 팔면 내가 시집갈 준비도 하고 오빠 대학 공부할 준비도 다 할 수 있다 해서 떠났는데 …
27살 양강도 출신의 김 씨는 이렇게 여름날 돈을 벌기 위해 두만강을 건어며 멀어져가는 고향을 강 건너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김혜성: 떠날 때는 정말 두만강 국경을 넘을 때 총알을 피해서 왔어요. 두만강 건너왔을 대는 신발이 벗겨져서 한발은 맨발이었어요. 그래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고사리를 꺾었는데 중국 사람이 먹어서 왜 먹냐고 했다가 정말 많이 맞았어요. 그 다음 생각하는 것이 살고보자 하다보니 다시는 못갈 걸음이 됐죠.
중국에서의 7년여 세월은 또 다른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더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한국행을 합니다.
김혜성: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아갈까 하면서 애를 키웠는데 앞에서 경찰만 봐도 도망을 치고 구급차 소리만 들어도 경찰이 오는줄 알고 숨을 못쉴 정도로 숨어있게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돼겠다. 오직 탈북자를 인정해 주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구나. 안전한 곳으로 가야하겠구나 하면서 한국행을 택하게 됐죠.
이젠 마음의 상처받지 않고 가볍게 얘기할 수 있는 상태가 됐지만 탈북부터 시작해 중국에서 숨어지내야했던 시간들 그리고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초기 남한생활은 두 번 다시 되풀이 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입니다.
김혜성: 그렇죠. 많이 느꼈죠. 나는 정말 정직하게 다른 곳을 안보고 앞만보고 어디 면접에서 떨어지면 내 실력이 모자라서 떨어지는가, 누가 뭐라고 욕을 하면 내가 잘못을 했으니까 그 사람들이 나를 탓하겠지 하면서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렸는데 제일 힘든 부분이 탈북자라는 말은 일생 내가 짊어져야하는 짐이더라고요. 그런데 딸한테까지 그런 것이 오는 것은 정말 힘들더라고요. 누가 뭐라고 하면 딸이 엄마 저사람들이 우리 북한 사람인 것을 아는 것아닐까? 경찰에 뭐라고 말하지 않을까 이 말을 하는데 정말 살점을 딱딱 후벼내는 것 같은 그런 아픔이었고 그리고 뭐라고 하면 너는 북한에서 왔으니까 모를 수 있지 이런 모든 사회적인 선입견이 힘들더라고요.
정말 바닥까지 내려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된다는 한계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아웅바둥 힘들게 메달려있던 줄을 그냥 놔버리려고 했던 순간 김 씨를 잡은 것은 어린딸 입니다.
김혜성: 한번은 제가 나름데로 열심히 노력했는데 뒤에서 어떤 사람들이 나보고 키가 조그맣고 성격도 나쁘고 딸도 있는 여자라고 하면서 동정을 하는데 그말을 들은 거예요.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하고 제가 술을 안마시는데 그날은 정말 많이 마셨고 나도 모르게 아파트 베란다에 의자를 놓고 올라가 있었더라고요. 그런데 딸 울음 소리에 내려다 보니까 우리애가 내 한쪽 발을 잡고 울고 있더라고요. 엄마 죽지마 나 안죽을래 하는데 그말을 들으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격증을 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공부를 합니다.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것을 위해 앞만보고 달렸습니다. 물론 주변 상황이 나아진 것은 없었지만 최소한 흔들리는 마음은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현재 김 씨의 모습입니다.
김혜성: 심리 치료를 하는 분이 최면치료를 하면서 마지막에 하는 말이 혜성 씨는 잘못이 없어 혜성 씨는 모든 것을 자기탓이라고 자책을 하는데 그때 혜성 씨의 선택은 최상의 선택이었던 것이고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너는 정말 잘못한 것이 없어 항상 최고의 선택을 한 것이었다고 말하는데 너무 가슴이 시원하더라고요.
기자: 현재 하시는 일은 뭡니까?
김혜성: 지금 직업은 양천구청에서 국가행정직 공무원을 하고 있는데 그 외 모든 활동은 직업상담, 심리상담, 직업진로상담 일을 해요. 아침 9시부터 6시 퇴근 하는 것빼고는 상담을 해요.
기자: 가장 보람되게 생각하는 것은 뭔가요?
김혜성: 우리 딸 생각이 바르게 된 것이고 두 번째는 제 손을 거쳐 공무원이 된 탈북자분이 7명인데 이분들이 나한테 와서 자기 어려움을 말하고 상담을 받고 또 자기 후배들에게 그것을 똑같이 해주는 것을 볼 때 내가 참 멋진 일을 하고 있다. 나도 이겨냈구나. 정말 잘하고 있다 하는 긍지가 있어요.
우연히 남한 땅을 밟게 된 것도 탈북한 달과 같은 여름이었는데요. 남한생활도 이젠 꺽어진 10년을 넘겼습니다. 마음의 여유와 생활의 안정을 찾으면서 2016년에는 시를 써 등단도 했습니다.
김혜성: 고향길 시를 쓰게 된 것은 설날 고속도로 정체상황이 나오는데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어떤 분들은 짜증도 내고 하는게 그게 왜 그렇게 투정같아 보이고 부러워보이던지…그래서 아파트 베란다를 내려다 보는데 주차장에 차들이 없더라고요. 다들 고향에 가고 하다보니까요. 그날 쓴 것이 고향길이죠.
고향길 -김혜성
사람은 저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다. 그 누군가는 비행기로 또 누군가는 배로 기차로 고향에 간다, 그러나 나에게는 고향으로 가는 길이 없다. 3만 여명의 탈북자들에게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없다. 뱃길이 없어서도, 하늘길이 없어서도 아니고 철길이나 고속도로가 없어서는 더욱 아니다. 철길은 판문점에서 끊어졌고 하늘길, 뱃길도 보이지 않는 선으로 끊어져 고향길이 없다. 그 끊어진 고향길 너머에 나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가 있고 내 고향 마당가가 있고 내가 뛰놀고 꿈을 키운 나의 학교가 있는데… 언제면 나에게도 기차 타고, 버스 타고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올가, 그 언제면 우리도 마음 놓고 편하게 고향 길을 갈 수 있을 가.
기자: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김혜성: 딸하고 약속한게 있어요. 저희 딸이 2020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데 목표가 지역인재 9급 공무원이 되겠다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데 저도 계약직 공무원이거든요. 그래서 엄마도 정규직 공무원이 되고 딸도 공무원이 되자 그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자서전을 출판하겠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양천구 구청 공무원인 김혜성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