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반면에 젊어서 너무 고생을 해서 노년에 골병이 들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주인공은 북한에서 지병을 얻어 탈북 했고 최근에는 척추 수술을 받고 재활 중인 올해 78세의 문성희(가명) 씨 입니다.
문성희: 조금 괜찮은데 앉으면 숨이 차서 누워서 말하니까 힘들어요.
함경북도 출신의 문 씨는 최근 척추협착증 수술을 받고 현재 집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습니다. 걸을 수는 있지만 조심스럽기만 한데요.
문성희: 한국에 와서 처음인데 병원에도 처음 입원했고요. 한국에 와서 한 10년 살았는데 병원에 입원하기는 처음이에요.
아무래도 나이가 고령이라 수술을 망설였지만1년전부터 상태가 심해져 여러 곳의 병원을 찾아가 상담을 받은 후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겁니다.
문성희: 겁났죠. 수술하기 전에 한국에 척추 수술 잘한다는 병원을 찾아서 딸이 휠체어를 밀고 다니면서 다 다녔는데 MRA 찍은 것을 보고 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수술비를 천 만원 넘게 불렀는데 친구 엄마 소개로 간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상담을 하는데 기분 좋게 대해 주더라고요. 그래서 수술을 결정 했어요.
병원에는 정확히 18일을 입원했는데 처음에는 다른 것보다 먹은 음식이 문제였습니다.
문성희: 맨 처음에는 수술하기 전에 이틀을 두 끼를 굶고 한끼 먹고 또 두 끼를 굶고 수술실에 들어갔거든요. 그리고 수술을 하고 나서는 통증이 오지 말라고 무통주사를 주더라고요. 여러 가지 약을 먹어서 아픈 것은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병원에서 주는 식사를 몸에 항생제를 많이 맞아서 그런지 입맛도 없고 해서 죽을 신청했는데 죽에다 반찬이 허술하게 나와서 울면서 밥을 못 먹겠더라고요. 딸 친구가 가까운데 있어서 내가 전화를 해서 내가 먹던 찰밥하고 반찬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조금 먹기 시작했는데…
사실 병원에는 환자의 상태에 맞게 의사 지시에 따라 조리를 하는 전문 요양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맛보다는 환자의 회복을 위한 영양분에 신경을 쓰고 소화가 잘 되는 조리를 하기 때문에 문 씨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던 겁니다.
문성희: 병원 측에 식사질이 나쁘다는 얘기가 들어갔는지 병원 요리사를 바꿔줬어요. 입맛이 돌아서고부터는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병원에서도 입맛 돌아오는 약을 줘서 먹고는 다리 힘도 생기고 그랬어요.
보통 사람들은 태어나서 한번도 병원에 입원을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병원의 식사는 어떤 것이 나오는지 또 거기서 장기 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어떻게 씻고 지내는지도 궁금하겠는데요.
문성희: 실 뽑기 전에는 목욕을 못하죠. 그런데 머리는 감겨 줬어요. 지금 코로나 때문에 일체 외부 방문인을 병원에서 못 받거든요. 그래서 간호사 조무사들이 전부 도와줬어요. 머리를 뒤로 해서 감겨 주더라고요 목욕은 실밥 뽑고는 내가 혼자 이틀 만에 목욕을 했어요.
허리에 3센티 정도의 수술자국만 있을 뿐 이제는 다시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도록 조심하면서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정말 큰 수술이었는데 수술을 받기 전까지는 얼마나 걱정을 하고 고민을 했었던지. 마지막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는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었습니다.
문성희: 정말 하나님께 많이 의지 하고 기도 하고 수술실 들어가기 전에 목사님이 기도를 해주고 했어요. 그랬더니 수술실 들어가는데 아무 생각이 없고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갔어요.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하고 나와서는 얼마나 추운지 내가 너무 춥다고 소릴 질렀더니 입에다 솜 같은 것을 물에 적셔서 물려주면서 먹지는 말라고 했는데 얼마나 좋던지 그리고 춥다고 하니까 이불을 두 개나 덮어줬더라고요.
문 씨의 남한생활은 14년이 됩니다. 지난 2006년 북한을 마지막으로 떠났을 당시 상황은 고난의 행군을 한참 지난 후였지만 생활은 여전히 힘들었고 자신도 중풍을 제때 치료받지 못해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습니다.
문성희: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무리로 쓰러지고 그때 당시 살림하기가 힘들고 하루 벌어 하루 살고 세 번째 탈북할 때는 내가 2005년에 풍을 맞았는데 막내딸이 중국에서 돈을 보내주면서 오라는 거예요. 딸이 브로커를 보냈는데 이제 가면 딸을 볼 수 있다. 엄마가 와야 한다. 그래서 내가 브로커를 따라 중국 왔어요.
다른 많은 탈북자들과는 달리 제3국에서 탈북자 신분을 인정 받아서 비행기를 타고 입국했던 것이 아니고 중국에서 배를 타고 들어와 입국장에서 탈북자라고 자신 신고를 했던 경우입니다. 남한에 도착했을 당시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문성희: 우리 북한과는 비교가 안되죠. 난 공항으로 온 것이 아니고 인천항으로 왔는데 경찰한테 북한에서 온 탈북자인데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고는 거기서 조사를 받고 밥 먹고 차를 타고는 눈을 감고 있는데 눈을 떠보니까 깜깜해요. 그때가 저녁 7시인데 차가 얼마나 많은지 그런데 차로 생각을 안하고 처음에는 꽃으로 생각했어요. 앞이 깜깜한데 앞차 뒤 빨간 불이 얼마나 큰지요. 북한에서 세뇌가 된 김정일 화로 생각했어요. 한국에는 김정일 화가 굉장히 많구나 밤에도 이렇게 꽃을 피워놨구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조금 있으니까 움직이더라고요.
처음 접하는 남한의 밤거리. 차를 타고는 긴장이 풀리면서 선잠이 들었고 비몽사몽 눈을 뜨고 차창 밖을 내다보니 빨간 것이 보여 그것이 북한의 김정일 화로 알았습니다. 사실은 앞차가 정차했을 때 켜지는 빨간 경고등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만큼 남한 사회는 문씨에게는 낯선 곳이었습니다.
문성희: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하나님을 만난 것이 제일 기쁜 일이고요. 하나님을 알고부터 교회에서 앞으로 통일의 문이 열리게 되면 북한에 들어가서 선교사로 일할 생각으로 공부를 하고 있어요.
64세에 시작했던 남한생활. 건강상의 이유로 일을 하지 못했고 몸조리를 하면서 대학을 다니는 딸과 함께 지냈는데요. 교회를 가게 됩니다.
문성희: 나는 처음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딸이 교회 가자고 하니까 갔어요. 처음에는 말씀이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오고 잠만 오고 뭐 때문에 교회에 다니고 뭐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 성경공부를 하면서 하나님 믿는 나라는 다 잘사는 나라다. 집을 건설하는 사람이 있듯 이 세상을 만든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신앙을 갖게 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남한사회에 서서히 적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북한에서 어릴 적부터 꿈꾸던 소원을 이루게 됩니다.
성희: 제가 기뻤던 것이 소원이 세계 일주를 하는 것이었는데 미국도 갔었고 여행사를 통해 워싱턴도 가고 또 북한에서 백두산을 올라가보지 못했는데 우리교회에서 성경공부 하면서 백두산 갔고 일본, 몽골, 러시아도 가고 더 하고 싶은데 건강이 좋아지고 코로나 끝나면 갈 수 있겠는지는 모르겠는데 한국에 와서 세계여행 다니면서 소원이 다 풀렸어요.
성경공부를 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또 교회를 통해서 외국 선교여행도 다니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데 문 씨에게는 아직 하나 더, 꼭 해결해야 하는 숙제가 있습니다.
문성희: 소망이란 것이 빨리 통일이 돼서 우리 딸들 만나보는 것이 소원이에요. 가족이 동생들도 있고 딸들 손주들 다 있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문성희(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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