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돌아가는 한 열린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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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몸이 아프면 정상생활이 어렵다는 말이 되겠는데요. 많은 수의 탈북자는 남한입국 전에 몸과 마음을 다친 상태에서 낯선 환경 그리고 아픈 몸이라는 이중고에서 남한생활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고속도로 요금 수납원 김근희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김근희: 저는 제 삶이 그래요. 내가 스스로 낙천적으로 명랑하게 살아야 밝은 마음을 가질 수 있어서 명랑하게 살고 있습니다. 마음은 아파도..

함경북도 회령 출신의 김근희 씨는 지난 1998년에 북한에서 아들을 잃고 탈북합니다. 고난의 행군 시절 북한의 아사사태에 직접적인 피해를 봤는데요. 남편과 시어머니 일가족 7명이 모두 아사했습니다. 이런 아픔이 있기 때문에 탈북 당시를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요. 먹고 살기 위해 장사길을 떠났던 중국에서도 이어졌던 거친 일들은 남한에 도착한 후에야 끝이납니다.

김근희: 정말 많이 힘들었죠. 처음에 한국에 와서는 너무 외로웠고, 슬펐고, 마음이 힘들었고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살지 하고 많이 울었어요. 한 1년은 울음으로 살았어요. 북한에서 너무 고생을 했으니까 내가 한국에 살자고 왔는데 죽으면 안되는데 너무 고생을 했으니까 와서는 너무 아팠어요. 숟가락도 못 들정도로 아팠어요. 그래서 살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김 씨가 원래 북한에 있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병이 나이를 먹으면서 심해졌던 것은 아닌데 남한에 도착했을 때는 자기몸도 제대로 가누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김근희: 지병은 없었고 제가 중국에 있으면서 두 번을 북한에 잡혀갔어요. 북한에 잡혀가서 많이 맞았어요. 첫번째는 전기고문에 몽둥이로 회령 보위부에 가서 죽도록 맞았고 두번째 역시 감옥에서 맞았지만 첫번째 북송 당해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고. 감옥생활 두 번 하면서 민족의 반역자라고 너무 많이 맞았어요. 그래서 내 몸이 이 뼈가 온전한데가 없었어요. 발가락 끝에서 손끝까지 뼈마디가 만지면 으스러질 정도로 몸이 망가졌었어요. 중국에서는 숨어살아야 하니까 마음이 긴장한 상태라 그 아픈 것을 참고 살아야 하잖아요.

기자: 중국에서는 몇 년을 살았는데요.

김근희: 11년이요.

중국에서의 두번의 강제북송과 재 탈북을 거쳐 남한에 정착한 것은 지난 2011년, 이제 남한생활이 햇수로 9년이 됩니다. 남한생활 전체 중 절반은 환자처럼 정상생활이 어려웠습니다. 더 힘들었던 것은 정확히 병명이 없이 온몸에 찾아온 고통 때문입니다.

김근희: 마음을 긴장하게 살 때는 아픔이 들어나지 않는데 한국에 와서 마음을 탁 놓으니까 몸에 병이 다 들어난 거예요. 그래서 3년정도는 아파서 정말 고생했어요. 너무 아파서 한국 자본주의 자유세계에 잘 살려고 왔는데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도 한동안은 많이 했어요. 제가 뇌 사진을 찍으면 구멍이 있답니다. 정형외과 선생님이 나한테 머리에 타박상을 입었는가 하고 물어봅니다. 이상하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북한에서 왔는데 머리를 너무 맞았어요 하고 말했어요.

1년은 정말 너무 몸이 아파서 아무것도 못하고 집에서 칩거하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일을 안하고 집에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뭔가 일자리를 찾았는데요. 육체노동을 안하면서 하는 일이 없을까 하던 차에 했던 일이 통일강의 입니다. 학교나 노인대학을 찾아 남한사람들에게 북한의 현실을 전해주는 일입니다.

김근희: 강의 하고 나면 머리가 아프고 20분만 서있어도 너무 힘들고 그랬는데 약을 먹으면 좀 나아지고 했어요. 한국와서 어떻게 살지 잘살려고 왔는데 아프지 말고 잘 살아야 하는데 이런 생각도 하고 강의만 하면서 살수는 없잖아, 이런 생각도 많이 했어요. 학생을 많이 대상했는데 방학만 하면 일거리가 없어지는 거예요. 아는 언니한테 하소연을 했는데 힘든 일을 못하니까 사업을 하자고 해서 여성들 건강속옷 있잖아요. 예쁜 속옷이요. 이 사업을 1년 했어요. 이런 일을 하다보니까 다단계를 알게돼서 지금 미국 온라인 사업을 통해서 여러 가지 다단계, 건강식품, 화장품 이런 것을 취급하게 됐죠.

남한생활 3년쯤 되니 건강도 많이 좋아졌고 이젠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습니다. 남한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자격증이나 학력이 없었기 때문에 사무직은 힘들었고 장사를 해보자고 해도 자본금이 문제였습니다. 이런 사정을 해결해 준 것은 신변보호 담당관이었습니다.

김근희: 경찰서에 가서 2시간 상담을 하고 왔는데 이틀 후에 전화가 왔어요. 풍기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면접을 보러 오는데 가실래요 하는 거예요. 5년 이내 탈북자를 찾고 있었는데 제가 한국에 온지 3년이 됐고 자동차가 있고 다른 직업이 없고 그런 사람을 찾는데 내가 딱 조건이 맞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들어오게 된거죠.

김근희 씨가 일하게 된 곳은 고속도로 통행료 받는 곳.

김근희: 항상 누군가는 이 문을 열어놓고 있어야 해요. 지구가 돌아가는 한 이 문은 절대 못닫아요.

고속도로 진입로나 출구에서 자동차를 상대하는 도로 이용료를 받는 수납원이 직업입니다.

김근희: 고속도로가 국가 도로인데 이 도로도 돈을 써서 만들었으니까 부서지면 보수를 해야 하니까 나라에서 이 도로를 운영하는 돈을 받아야 하니 고속도로 요금을 받는 거죠.

북한의 청취자 여러분은 김 씨가 하는 일이 북한의 큰 도로 길목 검문소에서 차를 잠시 세우고 검문을 하는 것 대신 요금을 받는다. 이런 모습을 상상하면 되겠습니다. 계약직으로 일하다 정규 직원이 됐는데요.

김근희: 작년 7월 1일, 4년반 만에 정규직이 됐어요.

기자: 어떻게 마음이 달라지던가요?

김근희: 마음이 이제는 해마다 계약직으로 쫒겨날 걱정을 안해도 되겠네 하고 한시름 놓이는 거죠. 계약 직일 때는 사장이 바뀔 때 마다 누가 또 나갈지 모르네 하는 근심과 걱정이 있었는데 이젠 정직원이 됐잖아요. 은퇴가 61살이거든요.

남들 보기에는 밀폐된 공간에서 8시간 근무하는 것이 갑갑해 보일 수도 있지만 운전자들이 건네는 따뜻한 마음 그리고 계속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기쁘다고 말합니다.

김근희: 지나가는 고객님들이 마음이 우러나서 주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 있다보면 사탕도 주고 빵도 주고 음료수도 주고 커피도 주고 그런 분이 많아요. 한 두 사람이 아니고요. 매일 봐도 안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쩌다 보는 사람도 자기차에 간식이 있으면 주는 분이 있어요. 값이 비싸서가 아니라 주는 사람의 마음이고 정성이죠. 우리는 하나를 받아도 감사하게 받는 거죠.

24시간 1교대 3명이 한 조가 돼서 운영되는 고속도록 톨게이트. 5년째 일하고 있는데요. 앞으로 10년 정년퇴직 하는 날까지 열심히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이라고 합니다.

김근희: 더 바라는 것은 없고 내가 건강하게 이자리 내 보금자리에서 보람을 느끼면서 사는 것 밖에는 없죠. 첫째는 아프지 않고요. 목표가 내 자식을 북한에서 하나 굶겨 죽이고 왔으니까 중국에 있는 내 아들한테 엄마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서 우리 아들한테 큰 도움을 주자 하는 것이 바람이죠.

제2의 고향 오늘은 고속도록 요금 수납원으로 근무하는 김근희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