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그에 맞는 대가를 받고 개인생활을 해야 만족이 배가 될텐데요. 오늘은 가자미식혜 등 반찬사업에 승부를 걸겠다는 함경북도 김책 출신의 한현정(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한현정: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다시 북한으로 돌아와서 장사 밑돈으로 하려고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에 갔던 거죠
한 씨가 탈북한 것은 1998년 4월 입니다. 부모님이 사망하고 생계마저 힘들었던 때에 결심을 했습니다.
한현정: 그때 당시는 북한사람이라면 다 굶고 사는 형편이라 나라가 힘들어서 배급을 안줘서 북한인민들이 이렇게 사는 구나. 그런 상황에서 살다보니까 앉으나 서나 눈 앞에는 먹을 것만 왔다갔다 하고요. 여기저기서 죽는 사람이 생겼고요. 그런데 탈북해서 중국에 와서 생각한 북한은 정말 사람으로는 살 수 없는 한마디로 철창없는 감옥이었어요. 감옥이라도 먹을 것이라도 주는 감옥이라면 좋겠는데 김정일 정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들을 개나 소보다 못하게 여기는, 너희는 굶어 죽던가 말던가 내 배만 채우면 된다. 이런 식이었단 것을 느꼈고요. 정말 사람이 살 수 없는 생지옥이란 생각밖에는 없어요.
북한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중국에 나와 자신이 어떤 생활을 했었는지 자연히 알게 됐고 그로부터 만 9년 중국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2007년 9월 다시 몽골루트를 통해 남한에 가게 됩니다. 그때 한 씨의 나이는 40살이었습니다.
한현정: 제가 탄 비행기가 울란바트르를 떠나서 인천이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그간 고생했던 일들이 비디오처럼 떠올라 눈물을 쏟았구요. 먹는 것은 중국에서도 잘먹었으니까 먹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요. 토요일에 하나원 동기들 하고 부산 기장 시장에 갔는데 거기는 대게집이 많아요. 사람들이 줄서 있는 거예요. 저게 뭐지? 저게 맛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줄을 섰겠지? 하고 가서 물어보니까 엄청 비싸더라고요. 대게 한마리가 7만원 정도 하는데 그것을 먹으려고 줄을 서있는 것을 보고 남한 사람들이 상당히 잘 사는 구나 나도 노력하면 저렇게 잘살 수있겠구나.
북한에서 바로 남한에 간 사람들에게는 거리의 높은 건물과 어디나 주차창을 방불케 하는 수 많은 차를 보고는 놀라겠지만 한 씨는 그런 것은 중국에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충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소소한 생활에서 접하는 일에 놀랐던 겁니다.
한현정: 중국 사람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은 없어요. 자기가 사는 것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는데 남한 와서 2개월이 됐을 때 인터넷을 보고 또 식당일을 다니면서 사람들 얘기를 들어 봤을 때 이 사회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많더라고요.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제가 말했어요. 남한 사람들 행복 속에서 행복을 모른다고 했어요. 살기 힘들다는 사람들이 그 비싼 대게를 먹으려고 줄을 서는가? 마트에 가서 쌀을 살때도 햅쌀인가 묵은 쌀인가 골라가면서 사냐고? 그게 정말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냐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데 그 행복을 모르는구나…
일단 중국에서와는 달리 숨어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당당한 국민으로 자신의 권리를 보장 받으면서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 만족한 생활을 합니다.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사는 기본적인 문제는 해결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걱정도 없었습니다.
한현정: 일자리는식당일도 했고 학생교복 만드는 회사에도 다녔고 그러다가 보험도 해봤구요. 자동차 부품 만드는 공장도 다녔고 여러가지 일을 해봤어요. 저는 이 사회에 와서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곳이구나 하는 그런 생각은 없었고요. 다만 우리는 중국에서 살 때 불법 체류자로서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신분이었거든요. 길에 경찰차가 지나가는 것만 봐도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 벌렁벌렁 뛰고 숨을 곳을 찾아 뛰어가기 바빴고 이렇게 생활하다 남한 사회에 오니까 날 잡아가는 사람이 없구나 그것만으로도 저는 안심을 했고요. 물론 돈도 중요하죠. 내가 당시 일하면 한달에 120만원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도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었고.
다만 문제가 된 것은 건강이었습니다. 그동안 북한에서 그리고 중국에서 몸을 너무 혹사시켰기에 관절이 모두 닳아서 회사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자신이 제일 잘 할수 있는 일을 찾게 되는데요.
한형정: 제가 회사를 다니녀야 하는데 회사 다닐 형편이 못 됐어요. 왜냐하면 제가 관절이 안 좋아요. 무릎하고 어깨는 통증이 너무 심해요. 회사에 일 다니면 한달 하고 두달을 치료 받아야 할 상황이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했는데 교회 권사님이 예배가 끝나고 나서 느닺없이 명태식혜를 먹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순간에는 나도 먹고 싶네. 내일 장봐서 집에서 해서 먹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집에와서 침대에 누었는데 식혜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의외로 주문이 많이 들어오고 시작한지 3개월이 됐는데 이미 드셔보셨던 분들이 주문하고 있고.
인터넷 판매 즉 전자상거래를 통해 자신이 만든 반찬을 판매하는 겁니다. 이제 한가지 고민은 해결이 됐는데요. 뒤돌아 보면 남한생활에 다시 적응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쉬지 않고 뛰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일만 한 것은 아닙니다. 순간순간 작은 것에서 행복감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한현정: 그런 것은 많았죠. 친구들 하고 영화도 보고 산에도 가고 바닷가에도 가고 했는데 제가 이 남한에 온 것을 가장 잘했구나 생각하게 된 것은 하나님을 알게 된 겁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겁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이고 최고의 가치인 것 같아요.
기자: 만나기 전과 후가 어떻게 변한 겁니까?
한현정: 하나님을 만나기 전엔 제 자신밖에는 몰랐고요. 배려심이 없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제 힘을 힘들게 번 돈이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한다고 힘들게 번 돈을 같은 탈북민들을 위한 봉사를 했고요.
오늘만이 아닌 내일을 준비하는 인생. 그리고 오늘 힘든 것은 내일을 준비하는 과정이란 것을 믿고 항상 자신의 목표를 향해 한현정 씨는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현정: 지금은 제가 자본이 없잖아요. 가게가 아닌 공장을 차려야 하는데 자본이 없다보니까 일단 혼자서 작은 가게에서 만들고 있고요. 앞으로 빠르면 1년 정도 후에는 매일 20kg 정도 매출이 생기면 공장이 세울 계획입니다. 가자미 식혜에 제 이름을 걸고 만들고 싶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함경북도 김책 출신의 한현정(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