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사람 표현 중에 붕어빵처럼 닮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아이들의 모습이 부모를 꼭 빼닮았을 때 그런 말을 많이 하는데요. 겉모습 뿐만 아니라 걸음걸이나 생각하는 것 등이 비슷하다고 느껴질 때 갈수록 붕어빵처럼 닮아간다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오늘은 내딸도 나처럼 엄마를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40대 초반의 이수경(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이수경: 힘들죠. 외로운 것도 힘들고 그런 것들이 너무 당연하다고 다 생각을 해서 힘들어서 나 죽을 것같아 이렇게 잘 생각을 안하는 편이라
남한생활 12년차가 되는 이 씨는 심각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데로 받아들이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 씨를 아는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요.
이수경: 딸을 혼자 키워서 다들 주위에서 대단하다 멋있다고 얘기를 하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제가 떨떨음한 표정으로 오히려 당연한건데 이렇게 얘기 하는 편이예요.
혼자 딸을 키우며 사는 것이 분명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선 경제적으로도 혼자 벌어서 생활비와 학비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도 그렇고 정서적으로도 둘이 해야 할 일을 혼자 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부딪치는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되는 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을 병적으로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수경: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을 때는 걸러서 듣고 판단을 하지만 제가 또 생각을 할 때는 제가 워낙 고민이 많은 편이라서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안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예요. 20대 초반에는 상처받고 울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친구한테 흔히 얘기 하는 배신 이런 것 받았다고 하는데 저는 배신이라고 표현을 안해요. 왜냐하면 저의 일방적인 생각일 수도 있으니까요. 친구관계도 그렇잖아요. 배신이란 생각은 안하고 그냥 그 친구랑 계속 관계를 가지면서 그 친구를 조금씩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고 조금 씩 이해가 되더라고요.
북한 고향에 대해 어떤 기억이 나는가 하는 기자의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수경: 그냥 바닷가랑 산, 어릴 때 친구들이랑 솝꼽놀이 하던 그런 생각이 나죠.
고향을 떠났던 일도 좋은 기억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왜 고향을 떠났나 그때 북한상황이 어땠는가 물어보면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이수경: 저는 약간 북한에서 있었던 상황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도 잊은 것이 많아서 기억에서 강제로 삭제를 했다고 할까요? 그런 식으로 지워버려서 잘 기억이 안나는 경우도 많고 듬성듬성 흐맀하게 기억이 나고 제가 20대 초반이잖아요. 그때는 나라나 주변에 관심이 전혀없었던 때이기도 하고 원래 어릴 때부터 내 가족이나 내 일 빼면 주위 상황에 전혀 관심을 안가졌던 편이라 이런 얘기를 하면 역사처럼 공부를 하고 듣고 아는 편이예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 자신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던 이 씨. 불안한 생활보다는 당당하게 신분이 보장되는 남한으로 가자는 결심을 하고 남한땅에서 2012년 새출발을 합니다.
이수경: 그땐 저도 처음 온 사람들처럼 방황도 하고 공부 같은 것을 하려는 생각을 안하고 일단 돈부터 벌려고 했어요. 식당도 감자탕 집도 전전했고 한 6개월 정도 일을 했는데 저는 고생을 많이 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제가 몸을 움직이면서 억척스럽게 일을 하는 것은 저랑 안맞더라고요. 너무 지치고요. 그 이후에 친구가 학원을 가니까 저도 같이 가서 3개월 배워서 자격증 따고 고용지원센터에서 취직을 시켜줘서 그때부터 사무직 일을 했어요.
기자: 사무직에 취직을 해서 경제적으로도 생활이 좀 나아졌습니까?
이수경: 그때 제가 일을 할 때는 사무직이 120만원 정도밖에 안줬어요. 식당은 150만원정도 줬을 거예요.
기자: 오히려 수입이 줄었네요.
이수경: 그런데 30만원이라는 차이를 가지고 식당일을 계속 할 생각은 없었어요. 제가 그때 진짜 원하는 일은 식당일이 아니었으니까.
기자: 그래서 만족은 하셨습니까?
이수경: 내가 배워서 배운 것을 써먹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에 단순노동 일은 관심을 많이 안뒀던 것 같아요.
한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쌓고는 좀 더 보수도 많고 좋은 환경의 직장으로 이직을 하는데요.
이수경: 제가 그 이후에는 이렇게 얘기 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처음 취직은 고용지원센터를 통해 해서 당연히 탈북자인 것을 알았겠지만 다음에는 탈북자인 것을 숨겼어요. 탈북자로의 대우도 받아봤고 평범한 한국 사람으로 대우도 받았는데 다르더라고요.
기자: 아무래도 말투도 다르고 해서 좀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 같은데요.
이수경: 살짝 의심하고 어색하게 듣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냥 경상도 사람으로 생각하시더라고요.
기자: 몇 년 정도 지나니까 그렇게 되던가요?
이수경: 2년정도 지나니까 그렇게 됐고 저는 중국에서 길림이랑 흑룡강성 쪽에 살아서 원래 말투가 경상도 말투를 했거든요. 그쪽에 사시는 분들이 경상도 분들이라서요.
기자: 말투를 그렇다고 해도 표현이 틀리기 때문에 표현을 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수경: 그렇죠. 그냥 저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따라서 많이 말을 했어요. 뉴스를 보면서 아나운서가 말을 할 때 따라 하고 아직도 간혹 그런 것을 따라 말을 할때가 있죠.
기자: 그렇게 남한식 표현과 발음 교정을 했군요.
이수경: 그리고 제가 오래전부터 좋아하는 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도 저한테 많은 도움을 줬죠. 말할 때 내가 빨리만 얘기하지 않으면 전혀 티가 안난다고 얘기를 해주는 편이예요.
얼마전에는 꼭 기억해야 하는 날이 있었는데요. 붕어빵처럼 자신을 닮은 이쁜딸의 중학교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이수경: 졸업식날 딸이 친구들한테 엄마를 보여준다고 약속을 했데요. 그래서 저한테 진짜 예쁘게 하고 오라고 해서 엄청 신경을 쓰고 갔는데 한 명 빼고 나머지 친구들은 다 갔다고 너무 서운해 하고 그리고 또 그 시기가 코로나 때문에 졸업식 현장을 못보고 부모님들은 교실에서 모니터를 통해 관람하고 나중에 만나서 사진 찍고 그런 식으로 했어요.
아쉬움도 조금은 있었던 졸업식이었지만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고 나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까지 오늘 같이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합니다.
이수경: 구체적인 계획은 없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 하자는 것이 목표니까. 일단 제 딸이랑 함께 살 집을 생각하고 있는데 제 힘으로 큰 집으로 이사를 가서 딸이 원하는 것을 해주고 대학 학자금 해주고 자리 잡을 수 있을 때가지 제가 도와주기 위해 준비를 해놓고.
어느덧 40대 나이에 접어든 이씨. 청소년기 북한의 힘든 경제상황에서 가족과 고통받아야 했고 20대에는 탈북과 함께 낯선 중국땅에서 불안해 해야 겠지만 나쁜 기억은 모두 지워버리고 오늘 현재에 충실하면서 긍정적인 생각만 하려고 합니다.
이수경: 그냥 지금까지 총정리를 하자면 부모님한테 부끄럽지 않게 잘 사려고 노력하고 딸한테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내가 망설이지 않고 우리 부모님이라고 얘기 하는 것처럼 저도 저의 딸에게 그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이수경(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