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탈북자가 사선을 넘어 남한에 간 것은 이 보다는 더 절박한 생존을 위한 선택인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소개할 여성은 북송과 재탈북이란 과정에서 병을 얻었고 남한에서 재활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사는 분입니다. 50대 중반의 손선화 (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손선화: 처음 한국왔을 때는 제가 많이 불편한 몸으로 왔어요. 한국에 들어설 때는 숨도 제대로 쉴수가 없고 …
13년전 남한에 입국했을 당시 손 씨는 간경화 진단을 받습니다. 간장에 질환이 생겨서 딱딱하게 굳는 병인데요. 만성 B형간염이나 C형간염 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고 심각한 상태에서 남한에 도착했던 겁니다.
손선화: 제가 초창기 탈북은 1998년에 하고 99년에 북송 됐다가 다시 탈북해서 중국에서 살다가 2007년에 또 다시 북송이 돼서 그때 감옥에서 간경화 복수를 얻어서 한국에 왔죠. 지금 병이 많이 나았는데 돌이켜 보면 처음에는 정말 벙벙했어요. 그러던 것이 한 5년 지나서부터는 한국 사회가 사람 사는 것이 정말 힘들다는 것을 세금 내고 이렇게 살면서 어떻게 생활을 유지해 나갈까 그런 생각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쨌든 북한에서 생활과 비교하면 지상낙원이죠.
회령의 탄광마을에 살 때 지옥을 경험했기에 남한생활이 낙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얘기를 들어보면 정말 그런 일이 있었겠는가 너무 과장을 한 것이 아닌가 할 수도 있겠지만 살아 남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손선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저희 고향은 탄광마을 인데 청진시나 큰 시는 배급을 끊은지 오래지만 저희들은 조금이라도 배급을 줬단 말이예요. 그런데 고난의 행군이 되면서 불시에 배급을 중단하니까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이 진짜 끔찍하게 죽어나갔어요. 저희 고향이 주변 농촌까지 하면 한 7천명이 사는데 한해동안 300명이 죽었어요. 아침에 깨나면 앞집에서 죽고 옆집에서 눈뜨고 있던 사람이 죽고 그러다 97년에 조카까지 죽고 나니까 공포감이 들더라고요.
손 씨가 말하는 지상낙원 같은 땅에서 멋지게 살아볼수도 있었겠는데 건강이 안 좋았습니다. 한번 손상된 간은 치료가 어려운 상태에서 복수가 차서 숨쉬기도 힘들었고 간이식을 받아야 했는데 사정이 안됐습니다. 그렇다 보니 정착초기에는 어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손선화: 내 건강이 좋지 않으니까 처음에는 막 짜증내고 사니까 내가 더 힘든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하고 교회를 나가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부터 내가 이렇게 살면 내가 더 고통스럽고 힘들다는 생각에 생각을 바꿔서 제가 긍정적인 생각으로 사니까 모든 것이 다 감사한 거예요. 어떤 날엔 짜증이 나는 날도 이런 시련을 주는 것도 앞으로 생활에 보탬에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모든 것에 감사하다고 생각하니까 이 세상이 지상낙원으로 보이는 거예요.
몸이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감사한 마음을 갖을 수 있는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부정적인 마음이 긍정과 감사의 마음으로 바뀔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럴수만 있다면 당장 그런 변화를 경험하고 싶은데요. 손 씨를 변화시킨 시기가 있었습니다.
손선화: 저는 바뀐 것이 한 3개월동안 교회를 나갔는데 병이 더 발작해서 심해졌어요. 그래서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그때 교회 성도님들이 매일 찾아와 기도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그러더라고요. 저도 그분들이 자꾸 보고 싶고 다시 만나고 싶고 해서 다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내가 이렇게 살아야겠다 스스로 판단을 하고 너무 힘들때는 내가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개그 프로그램이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내 마음을 다스렸던 거죠.
마음을 편하게 갖게 되니 삶에 대한 의욕도 생기고 차차 아픈 몸도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했습니다.
손선화: 처음에 대학을 다니게 된 것도 한국에 와서 아파서 아무것도 못하다가 사회에 나오니까 제가 너무 모르는 거예요. 저는 그래도 북한에서 석탄공업대학을 나오고 해서 같은 말을 하는 이나라에 와서 무서울 것이 뭐있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정작 나와서 살아보니까 그렇지 않더라고요. 내가 너무 사회를 모르는 구나 해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국제사이버대학 3학년에 편입을 해서 2018년에 졸업을 해서 사회복지사가 됐어요.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으니까 아동복지에 관련된 일이 있으면 동사무소에 나가서 일도 하고 이렇게 살았어요.
조금만 빨리 젊은 나이에 남한생활을 시작했더라면 또는 내가 건강한 몸으로 남한땅을 밟았더라면 내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겠는데 하는 마음에 대상없는 원망도 해보지만 곧 마음을 다잡습니다.
손선화: 아쉬움은 많죠. 내가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도 많죠. 그래더 한때는 거기서 난다긴다 하면서 살았잖아요. 사로청 위원장도 하면서 사오십명을 부리고 살았는데 여기와선 두발이 꽁꽁 묶였지 않았어요. 그래놓으니까 처음에는 진짜 그런 생각을 하니까 더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생각은 될수록 안하려고요.
현실생활에 충실하다 보니 옛날 북한에서의 기억도 더듬어볼 짬이 없습니다. 그래도 가끔씩은 아픈 기억이 떠올라 잠시 마음이 무겁습니다.
손선화: 북한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부모님은 다 돌아가셨으니까 지금도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조카들이 어린 나이에 고생하던 것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거예요.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항상 가슴아프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마음속 응어리가 풀리지 않네요.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산다는 손선화 씨. 남편이 열심히 혼자 벌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주니 고마운 마음이 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대학에 진학한 딸과 세식구 몸 건강하게 웃으면서 사는 것이 바람이라고 말을 맺습니다.
손선화: 우선 첫째 나는 여기와서 생활하는 것이 너무 쉬어요. 북한에서는 저녁 되면 쌀 걱정 뭐 걱정할 것이 많잖아요. 우선 그래도 쌀걱정 먹을 걱정은 안하잖아요. 돈이라는 것은 그렇더라고요. 시동생이 내가 시집을 오니까 형수 나는 돈을 많이 모아서 장갈 겁니다. 이랬는데 아직도 장가를 못갔어요. 돈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는 한푼도 없을 때도 있잖아요. 그렇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잖아요. 저는 딸이 올해 발걸음 들인 대학생활을 잘하기를 바라는 것 뿐이예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손선화(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