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살면서 이건 내 운명인가? 라는 말을 간혹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고, 앞날이 예측하기 어려운 다른 방향으로 바뀔 때 툭 터져 나오는 말입니다. 남한에 간 탈북자들은 이런 운명의 순간을 모두 경험하게 됩니다. 갑자기 벌어진 사건으로 전혀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인데요. 오늘은 함경북도 온성 출신의 최청하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최청하: 제가 한국에 온 것은 2000년도 입니다. 이제 햇수로 18년이 됐습니다. 정말 그때는 막연했죠. 어디 선이 없었습니다. 그저 떠나야겠다. 이런 한가지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고향을 갑자기 떠나야 했던 최 씨는 정말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보위부에서 집에 처들어와 아수라장을 만들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최청하: 오기된 동기는 여기 먼저 90년대 초에 러시아에서 유학하던 정현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부모님이 평양에서 추방돼서 제가 살고 있는 함경북도에 오게됐습니다. 그분들을 만나면서 정현이하고 중국동포들을 통해 연결이 됐는데 그게 큰 사건으로 번져서 부득이 북한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래서 북한을 떠났는데 아마 그런 사건이 없었더라면 지금 북한에 그냥 남아 있겠는지 아니면 거기서 죽었겠는지 모르겠는데 그 정현이 부모님들도 다 오고 둘째만 잡혀서 사형됐다고 하는데 정확한 그 과정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북에서 온 사람들 말에 의하면 사형됐다고 그래요. 그리고 정현이 그 어머니 하고 동생 두 명이 여기 왔죠. 제가 거기 연관이 돼서 내가 북한을 떠나 99년 떠나서 2000년에 한국에 오게 됐어요.
기자: 그 당시 함경북도에서 뭘하셨나요?
최청하: 그때 군대 복무를 23년 했는데 제대 돼서 함경북도 온성 남양에 와서 중국 건너편인데 거기 조그만 식료품 가공공장에서 무급 초급당비서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이런 문제가 터져서 할수 없이 떠나게 됐죠.
기자: 중국에서도 있을 수 있었는데 남쪽을 택한 이유는 뭔가요?
최청하: 그때 사실 탈북할 때는 내가 한국까지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내가 거기서 정치범 수용소에 가든가 교화소에 가든가 둘 중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떠나게 됐고 대낮에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그래서 중국에 왔는데 중국에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고 중국까지 오고 나니까 북한에서 유학갔던 정현이란 아이가 한국에 있고 하니까 한국과 연결을 하게됐어요. 그래서 정현이 도움으로 한국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2000년 당시는 고난의 행군을 막 넘어선 시기라 국경 경비가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던 탓에 무사히 중국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불법신분인 상태에서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었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그렇다고 다시 고향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선택한 남한행. 혼자 탈북한 최 씨는 남한으로 가서 북에 있던 가족을 모두 탈북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까지 마음졸여야 했던 세월이 5년입니다.
최청하: 그때는 뭐가 뭔지 몰랐고 중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올 때였는데 비행기에서 1시간 10분 정도 정말 많은 생각을 하면서 혼자 눈물도 쏟았죠. 그러면서 한국에 왔는데 초기에는 뭐가 뭔지 몰랐고 와서 하나원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하나원 5기 졸업생입니다. 당시에는 하나원 교육과정도 뚜렷하게 뭘 배워줘야 한다는 것도 없었고 막연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즐거운 마음이었습니다. 모두가 반겨줬고요. 그때만 해도 오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기에는 22명이 졸업을 했는데 그후에는 50명 100명으로 늘었는데 2000년 초기만 해도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와서 첫인상은 사람들이 정말 반갑게 대해주고 진심으로 대해준다는 것을 느꼈어요. 이게 정말 살 수 있는 땅이다. 자유란 것이 이런 것인가? 이런 것을 느끼면서 …
잠시 북한주민이 남한에 가면 제일 먼저 거쳐가는 하나원 설립 배경을 설명하자면 고난의행군 시절 이후 갑작스럽게 늘어난 탈북민을 수용하기 위해 1999년 7월 경기도 안성시 소재 7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육시설기관을 개소합니다. 이곳에서 남한사회와 자본주의 등의 기초 교육을 받고 사회생활을 하게된 겁니다. 최 씨가 남한에 갔을 당시는 51살로 무슨 직종에서 일할지에 대한 고민이 풀어야할 숙제였습니다.
최청하: 하나원 졸업하고 나와서 직장을 구애야 한다. 이런 문제를 많이 고민하고 나왔는데 나오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두 달동안 집에서 쉬었는데 그때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내가 앞으로 이 사회에 적응해 살아가자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고민하고 했는데 마침 서울 송파구에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에서 어떻게 알고 찾아와서 일할 수 없겠는가 해서 찾아갔는데 낮에 교회 경비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 가서 1년동안 거기서 경비 서면서 정말 많이 배웠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어렵운 상황을 피해가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다 보면 뜻하지 않던 기회가 생기기도 합니다.
거기에 한국일보 이사장 하는 분이 장로로 있었는데 그분이 소개를 해줬습니다. 내가 지나다니면서 보니까 최 선생이 여기서 그냥 앉아있지 않고 책도 많이 보고 하던데 혹시 글을 써본 경력이 없는가? 기자를 모집하니까 가봐라 해서 봉천동에 세계연합신문이라는 주간지가 있었습니다. 거기 가서 시험도 치고 해서 기자생활을 했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우선 가서 일하려니까 문법이 틀려요. 북한은 철자 문법이라고 하는데 여기는 두음 문법이지 사전이 있는데 국어 사전도 다 달랐어요. 2년동안 겨유 버티다가 마침 숭의동지회에서 일할 의향이 없겠는가 하는 말을 듣고 거기서 일하게 됐습니다.
최청하 씨는 기자 생활을 접고 탈북자 친목단체인 숭의동지회에서 이후 11년간 사무국장일을 맡아했습니다. 그러면서 탈북민이 남한정착에 큰 어려움없이 안착하자면 본인의 노력도 있어야겠지만 그못지 않게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주면서 화합이 돼야 한다는 점도 알게 됩니다.
최청하: 단순하게 사람이란 것이 먹고 쓰고 하는 것만 풍족하면 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살아가는 데는 정말 마음이 편하고 일반적인 근심 걱정이 없어야 하겠는데 생각을 계속 많이 하게 되죠. 그리고 정말 내가 제대로 정착할 수 있겠는가? 이런식으로 해서 앞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도 되면서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옆에서 말 한마디라도 정답게 곱게 해주면 그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고요. 그래서 저는 탈북자들이 정착하는데 사람들이 정말 가슴으로 안아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진심일 때는 꼭 그것을 알게 되니까 사랑으로 대할 때 정착이 빠르겠다는 교훈을 얻게 됐어요.
기자: 선생님은 그때 처음에는 혼자 남한입국을 했고 그 후 5년동안 북에 있는 가족들을 모두 데려가신 겁니까?
최청하: 네, 딸들까지 모두 오게 되다보니까 5년 걸렸습니다. 집사람은 제가 오고 인차 왔고 아이들 셋이
오다 보니까 맏딸이 제일 늦게 왔는데 여기까지 오는데는 5년이 걸렸습니다.
기자: 남한에 간 탈북자분들이 또 다른 이산가족으로 힘들어 하는데 일단은 시간은 걸렸지만 가족과 함께
생활을 해서 마음의 안정을 찾으셨겠어요?
최청하: 집사람은 인차 왔는데 아이들 오기 까지는 정말 마음 고생이 컸죠. 아들은 여기 오는데 중국에서 3번을 잡혔어요. 그런 힘든 과정끝에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집사람과 싸우기도 많이 싸웠어요. 제가 여기 왔기 때문에 이런 마음 고생을 한다 이제 아이들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도 하고 이런 문제로 싸우기도 했는데 그 이후에 아이들이 다 오고 마음의 안정을 가지면서 우리가 여기에 오길 정말 잘했다. 현재 아이들이 다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초기에는 싸움도 많이 하고 호상 가족간 갈등도 있었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힘든 과정이 있겠다는 생각도 하고 어떻게 하든 정착을 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할 때 좋은 결실을 보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함경북도 온성 출신의 최청하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