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하구, 피부미용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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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습니다. 실패가 없는 성공이란 불가능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12번 시험에 떨어지고 13번만에 붙었다고 한다면 도대체 어떤 시험이었을까 하고 궁금해지는데요. 이제는 걱정없이 꽃길만 걷고 있다는 50대 중반의 피부미용사 허정희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허정희: 저도 거짓말 같아요. 탈북민으로서 최초로 부산지회 사하구 지부장으로 됐거든요.

2014년 남한에 입국한 허 씨는 현재 부산에 살고 있습니다. 피부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거주 지역의 대표로 선출됐습니다.

허정희: 지부장이 구별로 있어요. 사하구, 서구, 해운대구, 남구, 진구, 북구 등이 있는데 저는 지부장 하기 전에 부지부장을 했어요. 부지부장을 하면서 작년 4월부터 우리 사하구 원장들로 해서 복지관에 가서 어르신들 손마사지 봉사를 한달에 한 번 했거든요. 매달 쭉 해오고 있거든요.

열심히 일하면서 봉사활동에도 참여를 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려온 허 씨. 정착초기에는 탈북자로 차별을 받는다는 생각에 오해도 많이했습니다.

허정희: 지금와서 보면 내가 조금 너무 했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아직도 탈북민 티를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는데 꿈은 반드시 이뤄진다고 하잖아요. 저는 한국에 와서 제가 50대 인데 회사 들어가서 한 20일만에 조장을 했어요. 그때 생각한 것이 반드시 나만 열심히 하면 어디서든 인정 받는다. 탈북자라고 한국분들한테 차별받지 않는다. 다들 지지하고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말이예요. 나는 북한에서부터 해오던 발마사지를 하면서 살자는 거죠. 학원을 다녀서 자격증을 땄는데 사업을 할 수없어서 국가자격증을 땄어요. 필기 실험을 다섯번 만에 합격했는데 말이 달라서 힘들었어요. 하루 몇 시간 안자면서 열심히 살았거든요.

틀린 문제를 공부하고 시험을 보러가면 같은 말인데 다른 용어로 질문을 하고 있었고 그것은 외래어였습니다. 허 씨는 당황했고 그러길 다섯번. 어렵게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국가자격증을 위한 두 번째 관문인 실기시험을 봅니다.

허정희: 실기시험을 보는데 처음에는 구석자리만 찾았어요. 감독의 눈에 덜 띠는 곳만 찾았어요. 첫번 시험은 제모하는데 털이 있는 사람을 데려가야 하는데 사람을 못 찾아서 신랑을 데려갔어요. 곱게 화장을 해서 데려가니까 선생들이 황당해 했어요. 그래서 시험도 못치고 떨어지고 그다음에는 위생복 입었던 것 단추를 다 열어놓고 갔었고 또 시험 떨어지고는 이게 아니다 해서 다시 따로 시험치기 위해서 야간반을 찾아 다니면서 공부하다가 시험을 치는데 60점이면 합격인데 계속 떨어졌어요.

처음 몇번은 경험이다 하고 받아들이지만 다섯번이 넘으면서 지치기 시작했고 또 떨어질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매번 통과 점수에서 불과 몇점이 모자란 겁니다.

허정희 씨가 지난해말 받은 자랑스런 구민상 상패.
허정희 씨가 지난해말 받은 자랑스런 구민상 상패. (/허정희 씨 제공)

허정희: 12번을 시험을 치는 시간이 1년7개월이 걸렸는데 2년안에 합격을 못하면 필기시험도 다시 쳐여 하거든요. 회사 다니다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시험을 보는데 한 1천만원은 들었어요. 모델 비용 들어가고 재료비 사고 하니까 그렇게 됐는데 시험을 쳐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사장님을 찾아가서 난리를 쳤어요. 그랬더니 하는 말이 취업율 때문에 10대 20대를 우선 합격을 준다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40대 50대는 합격율을 조금 떨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면 50대 60대는 시험을 치지 말라고 하지 이런 법이 어딨는가 하면서 막 그랬어요. 이쨌든 내가 잘못했으니까 떨어졌겠죠. 그분들의 잘못은 아닌데…

보통 사람같으면 이것은 내길이 아니구나 하고 포기 했겠는데 조선족 남편이 계속 남한에 살려면 사업자 등록을 해야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피부미용사 자격증을 따야만 했습니다. 결국 13번만에 손에 쥔 자격증.

허정희: 합격이 나오면 난 막 좋아서 춤출줄 알았어요. 그런데 신랑하고 붙잡고 울었어요. 눈물이 나오는데 그 자격증 하나가 목숨줄 같았단 말이예요. 우리 신랑이 저한테 정말 잘하는데 사업증이 안나와서 남편 비자가 안나온단 말이예요. 그래서 급했단 말이예요. 2월 1일 발표한 날 자격증을 받아서 구청가서 사업자 등록을 내고 했어요.

허 씨의 경우를 보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다른 길을 모색하면 의외로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의 탈북과 남한입국 과정도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는 아닙니다.

허정희: (아들이) 외할아버지 때문에 대학을 못가게 됐는데 아들이 하는 말이 어머니 우리 이제는 장사꾼이 됩시다 이러는 거예요. 나는 뼈속까지 주체사상으로 물들어서 아이들을 나라에 받치려고 대학공부 시키고 열심히 살았는데….아들이 잘못 될까봐…

허 씨 2013년 북한에서 중국 비자를 받아 사사여행으로 잘못된 아버지의 문건을 바꾸기 위해 떠났습니다. 아버지가 일본 장교가 아니라는 중국 측 군인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죠.

허정희: 해결했거든요. 아버지 살던 곳에 가서 지인들에게 보증받고 정부에 가서 확인 받고 했는데 그때 북한에서 장성택 총살 당한 것을 중국에서 봤거든요. 내가 중국에서 문건 해결은 했지만 북한가서 해결하려면 하부 말단 보안서 문건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중앙당 문건까지 다 거치려면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해결을 하겠어요. 포기했죠. 장성택이도 죽이는데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해결하겠는가 하고 포기 하고 내가 울면서 온 것이 내가 오면 우리 신랑이 이혼을 하고 다른 여자를 얻어서 엄마가 다르면 우리 아이들에게는 지장이 없단 말이예요.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새로 시작한 남한생활. 정착초기에는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는데 지금은 많이 변했습다. 결과가 좋다보니 지난온 고난도 감사하게 느껴지고 원망스러웠던 순간들도 아름답게 변합니다.

허정희: 12번 시험에 떨어진 이유가 있구나 다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작년에 느꼈어요. 대회 마치고 나왔는데 우리 부회장님이 나한테 원장님 정말 잘했습니다. 큰상을 받겠습니다 이러더라고요. 처음에는 손이 떨렸는데 나중에는 차분하게 다른 사람이 모르는 기술동작을 실수없이 깔끔하게 해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2019년 부산광역시장배 피부미용 기능경진대회에 출전했던 허 씨는 메달을 땄습니다. 당시 지역신문에 난 보도 내용 잠심 소개를 하자면 “탈북해 현재 피부관리실을 운영하며 학업을 병행하는 국제피부미용반 1학년 허정희 씨는 두 종목에 출전해 발관리 부문 중앙회장상과 다리 부문 국회의원 상을 수상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2019.10월17일 부산일보 -

이제는 모든 원망이 사라지고 모든 것에 감사하다면서 내일도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고 허 씨는 말합니다.

허정희: 남한이라고 하면 우리는 서있으면 눈도 뽑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와서 보니까 시간이 지나고 알면 알수록 사람들이 너무 따뜻하고 제가 점점 북한에 대한 것을 잊을 정도라는 느낌이 오거든요. 너무 따뜻하게 대해주니까요. 그래서 이런 분들에게 나도 배려하면서 베풀면서 살아보자는 이런 여유가 생깁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부산에서 피부미용샵을 운영하는 허정희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