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주민이 남한에 가면 많은 분들이 대학에 가고 북한으로 치면 준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대학원에 진학 합니다. 북한에서는 이루지 못한 학업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인데요. 오늘은 최근 신학교 석사과정을 마친 고미화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고미화: 기도를 계속 하면서 자꾸 생각해봐야 하지만 하나님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 복음으로 전도를 해야 하지 않나…
함경도가 고향인 고 씨는 최근 신학대학원을 졸업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학업에 성취를 이룬 겁니다.
고미화: (기분이) 남달랐죠. 북한같았으면 돈이 있어야 공부도 하고 힘이 있어야 공부도 하겠는데 한국은 누구나 배우고 싶으면 다 배울 수 있는 배움의 나라잖아요.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하면 다 할 수 있는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인데 그래도 학사모 쓸때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는 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자부심을 가졌는데 석사모를 쓰고 사진을 찍으니까 정말 그 기분은 더 말할 수 없죠. 박사까지는 못해도 석사까지 왔는데 그 기분은 어디다 말하겠습니까. 부모님 계시면 부모님 제가 공부를 해서 석사가 됐습니다 하고 얘기를 하겠는데 전화통화도 안되는 형제들에게 얘기도 못 하잖아요. 그러니 혼자서 고향을 그리면서 동생이 이렇게 석사 모자를 쓰고 졸업까지 했어요 이러면서 마음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1998년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8년을 살았습니다. 고향을 떠날 때는 탈북도 아니었고요. 도망쳐 나온 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도강을 계획을 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저 살려고 몸부림 치다보니 황당한 상황에 처했던 겁니다.
고미화: 탈북할 때 나는 중국에 가서 살려고 한 것은 아니고 한달동안 중국에 가서 돈을 번다고 갔는데 인신매매를 당해서 팔려가서 중국에 갔는데 동서남북을 모르니 애를 낳고 거기서 살아야 되는 형편에 고향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때 당시는 …
고 씨가 남한생활이 5년쯤 됐을 때 기자가 전화를 해서 통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 2013년 12월 방송 잠시 들어보시죠.
고미화: 좀 적게 자고 일이 있으면 돌아다녀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 직업을 택한 거죠. 세상에 여자 남자 일이 어디 따로 있습니까? 저는 낮에는 공부를 하니까 밤에 일을 하는데 여자가 왜 살림을 하지 이렇게 나와 대리운전을 하는가 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가정형편이 안되면 여자도 나가 벌어야죠. 북한에서는 여자도 장사를 해서 집안을 살리는 데 한국은 훨씬 나은 형편인데 다 할 수 있죠.
기자는 그때 참 열심히 사는 여성이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당시 고 씨는 대리운전 일을 하면서 사이버 대학에서 복지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북한분들은 좀 생소하겠지만 대리운전은 밤에 술에 취했거나 운전을 할 수 없게 된 사람이 자신을 대신해 차를 몰아줄 사람을 부르는 겁니다. 보통은 남성분들이 대리 운전을 많이 하는데 여성이 밤에 대리운전을 한다고 해서 특별히 기억에 남았습니다.
고미화: 사이버 공부도 하고 내년 봄에 졸업하는데 뭐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어요. 말도 통하고 자기가 열심히 하면 되는 건데 그게 뭐 어려운 것이 있겠습니까?
고 씨는 남한에 가서 자동차 부품조립 공장에서도 일해보고 또 동네 보건소에서 탈북자를 대상으로 건강상담사로도 잠깐 일도 해봤다고 했습니다. 그때도 공부를 하는 이유를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자격증이 필요해서라고 했는데요. 다시 들어보시죠.
고미화: 저는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돕는 그런 일을 하고 싶어요. 내가 어려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 돌아가시는 모습을 봤지만 북한에는 사회복지라는 것이 없잖아요. 남한에서는 다 일하니까 돌볼 사람이 없으면 노인을 양로원에도 보내고 하지만 북한에선 추운 골방에서 혼자 누워 죽는 그런 할머니 모습이 생각나 아직도 마음이 아프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이를 데리고 봉사활동를 많이 다녔어요. ]
정말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갔습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불법체류자가 돼서 강제북송을 안당하기 위해 중국공안을 피해 숨어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생활을 해왔던 고 씨였기에 주민증을 받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남한에서는 거칠 것이 없었던 겁니다. 2013년 12월 통화 당시 봄이면 졸업을 한다고 했는데 그후로 신학을 공부하고 이번에 준박사 과정인 석사로 졸업했습니다.
기자: 신학대학 7년 다니실 때는 일은 안하셨습니까?
고미화: 일은 했죠.
기자: 학교는 아침에 가서 낮에 끝나는 그런 학교는 아니었나봐요?
고미화: 아니죠. 먹고 살고 가정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또 학비를 마련 하려면 공부만 해서는 학비를 마련 못 하잖아요. 그러다보니까 한주일에 두 번 학교를 가고 그렇게 하면서 공부를 했죠.
자신의 미래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는 고미화 씨. 학교 공부와 생활 그리고 가두여성(가정주부)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고미화: 우리가 신용카드를 쓰잖아요. 은행에서 주는 카드를 사람들이 신청하면 그것을 배달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우체국에서만 배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배달하는 업체가 있어요. 공부하면서 할 수 있는 직업이란 것이 그것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일을 하려면 회사에 출근해서 8시간을 매여있어야 하는데 공부를 한주일에 두번씩 하는데 어느 회사 사장님이 좋아하겠어요. 그래서 생각끝에 배달하는 것은 시간을 내면서 할 수 있고 하니까 공부도 할 수 있고 돈도 벌수 있는 카드배달 기사를 하는 거죠.
혼자 열심히 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죠. 자녀도 돌보고 남편 뒷바라지도 해야 하고 또 자신의 일도 있으니까. 그래서 말은 쉽게 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가족에게 더 감사하고요.
고미화: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많았죠. 그렇지만 또 옆에서 목사님이랑 남편이 많이 응원해주고 했으니까 가능했어요. 나 혼자 공부를 하려고 하면 또 가정살림을 하자니 힘에 붙이고 그랬어요. 또 돈도 벌어야 하지 그러니까요. 그런데 옆에서 많이 응원해주시는 분도 계시고 하니까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됐고.
힘들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불평하지 않고 저 멀리 앞을 보고 달려가는 고미화 씨. 이제 조만간 자신이 진짜 원하는 해외선교사로 또 다른 생활을 시작할 겁니다.
고미화: 올해는 강도사 자격까지 받는 것이 목표고 강도사가 되고 그 다음은 목사까지 ….강도사가 목사전에 강도사잖아요.
기자: 그러면 최종 목사님이 되려고 하시는 겁니까?
고미화: 목사님보다는 저는 선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선교사는 교회에서 집사님도 선교를 가시는 분도 계시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자격증을 받은 사람이 가는 것이 더 사명감이 있잖아요. 현지에 가서도 자격증을 가지고 가는 것하고 없이 가는 것하고 또 사명이 다르거든요. 지금 학교에서는 목사 안수까지 받고 선교사를 나가라고 하시는데 선교사로 나갔다가 목사 안수를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선교사가 되고자 하는 고미화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