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명, 우리 쌍둥이 아니예요

경남 밀양시 단장면 들녘에서 한 농민이 불볕더위 속 땡볕을 가리기 위한 가림막을 설치해 놓고 깻잎을 수확하고 있다.
경남 밀양시 단장면 들녘에서 한 농민이 불볕더위 속 땡볕을 가리기 위한 가림막을 설치해 놓고 깻잎을 수확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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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탈북자들의 남한사회 정착초기에는 웃지 못할 일들이 많이 벌어집니다. 당사자에게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순간이지만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는 사람에겐 황당한 사건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오늘은 개성이 고향인 남한생활 8년차 양은경 (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양은경: 돈이 많이 쌓이면 통일의 그날이 빨리 앞당겨 오겠구나 이런 마음으로 통장에 돈을 채워요.

양 씨는 정부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민간단체 소속의 통일운동가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통일을 간절히 원하는 것은 북한에 있는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양은경: 1년에 한 번씩 돈 보내주면서 연락을 해요. 안 나오겠데요.

기자: 네, 그냥 돈만 보내주면 여기서 살겠다 하는 군요.

양은경: 돈도 많이 안보내줘요. 내가 아프고 병원에 입원할 때는 돈을 벌지는 못하거든요. 엄마가 보내지 말래요. 혼자 산다고

양 씨는 북한에 있는 가족과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엄마를 설득해 보지만 언제나 같은 말만 듣습니다. 그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적은 액수지만 명절 때가 되면 중국을 통해 북한에 송금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없는 이산가족이 돼버렸지만 10년 전 탈북의 순간으로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운명이 크게 바뀔 것같지는 않습니다.

양은경: 2007년에 제가 두 번째로 북송 됐거든요. 감옥 생활 끝나고 2009년 이 사회에서 못 살겠다. 중국을 통해 무조건 남조선을 찾아가야 한다는 한가지 생각으로 입국했어요.

중국가서 돈을 벌어 돌아오자며 시작된 탈북은 중국에서의 강제북송 그리고 재탈북의 악순환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재탈북해서 만난 남한 선교사의 말을 듣고는 희망을 갖습니다. 북한주민이 남한에 가면 정부에서 정착금도 주고 집도 줘서 당당히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양 씨는 결심을 하고 노동단련대를 나오는 길로 도강을 해서 2009년 11월 남한행을 합니다.

양은경: 그때는 제가 교통사고를 당해 심하게 아팠어요. 비행기 탔을 때 정신을 잃었어요. 눈을 떠보니 대한적집자 병원이었어요. 거기서 치료를 받았어요. 학교다닐때 한국은 나쁘게 배웠는데 대우를 잘해주고 하니까 우리는 같은 민족이란 감을 느끼고 우리가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한행을 하던 중 제 3국에서 교통사고을 당해 위험한 순간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불법신분의 몸이라 병원에도 가지 못했고 어렵게 비행기에 올랐는데 긴장이 풀리며 정신을 잃었던 겁니다. 남한에 도착하자마자 신병치료를 받고 사회정착교육시설인 하나원에서 3개월동안 생활합니다. 그때는 하루빨리 사회에 나가자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도 벌고 곧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상상도 했고요.

기자: 거주지 배정 받아서 알아서 먹고 사십시요. 이젠 남한생활 시작이구나 했을 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양은경: 그때는 솔직히 너무 힘들었어요. 보름 정도는 고생했어요. 하나원 있을 때는 우리도 빨리 사회에 나가서 생활했으면 좋겠다 했는데 브로커 비용을 300만원을 주다 보니 돈이 없었어요. 4월에 하나원 나올 때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겨울옷을 입고 나왔거든요. 대구에 오니까 4월인데 너무 덥고 우리가 돈이 없다 보니까 남의 밭에 가서 미나리, 민들레 캐니까 주인들이 막 욕하고요. 북한은 국가 땅이니까 니밭내밭이 없잖아요. 여기와서 남의 밭에서 남새를 캐니까 주인들이 자기네 밭이라면서 욕하고요.

같은 언어를 쓰지만 북한과는 전혀 다른 사회에 살게 됐다는 것을 느꼈던 첫 번째 황당한 사건입니다. 하나원에서 대구에 있는 아파트로 갈 때 하나원 동기가 다 섯명이 있었는데 같은 아파트 건물에 살았습니다. 없는 사람끼리 서로 의지하면서 지낸 기억인데요. 당시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자기가 생각해도 웃음밖에 안나오는 황당한 일을 너무도 태연하게 했던 겁니다.

양은경: 우리는 남조선이 처음이니까 숟가락 젓가락 살 때도 6명이 같이 다녔어요. 돈이 없으니까 똑 같은 동복, 신발 하고 다녔거든요. 그러고 다니면 아파트 사람들이 쌍둥인줄 알았어요. 신발도 똑같은거 옷도 똑 같은 거를 입고 다녔으니까요.

어느날 갑자기 새로 아파트에 입주한 6명의 아줌마가 날도 안추운데 똑같은 겨울옷을 입고 몰려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요. 아무리 남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개인주의 사회라고 해도 이렇게 하고 다니면 시선을 끌 수밖에 없는데요. 대낮에 남의 밭 도발까지 하면서 노래까지 불렀으니 말입니다.

양은경: 강변에 돌미나리 있잖아요. 그걸 자기가 심었데요. 미나리가 저절로 나오는 데 자기가 심었다고 하니까…새까만 비닐 봉지에다 쭉 훌트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캤어요. 많이도 안캤거든요. 노래를 부르면서 캐는데 주인이 나와서 어디서 온 사람들인데 남의 밭에서 마음대로 캐는가 하기에 우리는 같은 민족인데요. 백두산에서 왔어요 했어요. 미나리 한줌에 3천원인데 돈이 없었거든요. 브로커 비용 주고 돈이 없잖아요. 말도 안 통하지 시장가서 깍아주세요 해도 안깍아주고 얼굴을 쳐다 보고요. 같은 민족인데 왜 우리를 볼까?

많은 수의 탈북자가 중국에서 남한행을 할 때 브로커를 끼게 됩니다. 남한에 도착할 때까지 숙식과 이동에 따른 경비 등을 남한에 도착해 정착금을 받으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입니다. 그 탈북비용을 지불하고 나면 당장 일을 해야 생활이 되는데요. 물론 하나원을 나와 6개월은 정부에서 최소생활비 지원을 하지만 빈손으로 시작한 남한생활이기에 숟가락부터 시작해 생활도구들을 장만 하자면 돈이 솔솔치 않게 들게 됩니다. 당장 먹을 쌀은 탈북자 지원단체에서 후원을 한다지만 반찬거리는 직접 마련해야 합니다. 북한에서처럼 시장에 가서 흥정을 해보기도 하지만 말투가 틀려서 그런지 통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양 씨와 고향친구들은 자급자족을 시도했던 것이고요. 이런 사정을 알고는 밭의 주인은 양 씨와 친구들을 일꾼으로 썼습니다.

양은경: 첫달 월급이 그때 150만원이었는데 주인이 옷도 주고 된장도 주고 신발도 주고 저녁에 갈때는 먹을 것도 주다 보니까 행복하다 할까? 우리가 한국에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손이 필요한 농사철이면 밭일을 했지만 농한기가 되면 집 주변 식당에서 설거지도 하고 주방일을 돕는 시간제 일도 했습니다.

양은경: 제가 아프면서도 악을 쓰고 일하니까 사장님도 인정을 해주고요. 사장님이 자꾸 북한이모라고 하는데 같이 일하는 사람이 북한거지가 왜 남의 나라에 와서 큰소리 친냐고 … 그 말을 들을 때면 때려 치우고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왜 북한거지란 말을 듣고 여기서 일해야 하나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목숨을 걸고 힘들게 왔지, 내가 여기서 지면 아무것도 아니지 한 달동안 굶으면서도 태국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버티니까 사장님도 그 욕한 여자를 쫒아내고…

어디서나 열심히 일하니 인정도 받고 수입도 늘었습니다. 언어의 차이,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도 서서히 사라지고 남한사회 적응이 돼 갑니다. 그러면서 북한에 있는 가족 생각이 더 간절해 집니다.

양은경: 그때는 나 혼자니까 한달에 150만원 받던 월급을 아무것도 안쓰고 적금을 넣었어요. 저금해서 북한에 가족을 먹여살리자고 적금부터 들었어요. 겨울에도 난방도 안틀고 물도 찬물로 목욕했어요. 모든 것이 쓰는 것만큼 돈이 나가잖아요. 내가 얼마나 힘들게 벌었어요. 쓰기가 아까웠어요. 돈이 모이면 모인 돈의 반은 북한에 보내고 그랬거든요.

기자: 지금 돌아보면 남한생활이 어떻습니까?

양은경: 식당에서 일하면서 손님도 북한음식이 단백하고 좋다고 하고 내가 돈을 벌어서 북한에 가서 쓰자 이런 생각이 들고 내가 좀 더 빨리 왔으면 돈을 벌어 부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남한생활 8년차 양은경(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