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하나원에 있는 탈북자들이 강의를 듣기 위해 건물로 들어가고 있다.
하나원에 있는 탈북자들이 강의를 듣기 위해 건물로 들어가고 있다. (ASSOCIATED PR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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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흰머리가 성성해도 부모에게 자식은 언제나 아이인가 봅니다. 남한에 간 딸은 꼬부랑 할머니가 된 엄마의 건강을 걱정하고 늙은 노모는 혼자 사는 딸이 건강하게 잘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오늘은 좌충우돌 실수를 연발하는 남한생활 8년차 양은경 (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양은경: 이밥 한 그릇 못 해준 것이 미안하고 이제 통일이 되면 엄마 이밥도 많이 해주고 싶고 엄마를 많이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어요.

북한에서는 4.25담배 농장에서 일했다는 양 씨. 경제적 이유로 탈북을 했고 중국에서 강제북송을 두 번 당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탈북 때 압록강을 건너 중국을 거쳐 남한으로 갔습니다. 2009년 11월 중국에 서는 더 이상 숨어살 수가 없어 남한행을 했습니다.

주위에서 양 씨는 효녀 구두쇠 또는 억척어멈으로 불리기에 모라자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 양 씨 손에 들어간 돈은 나오질 않으니까요. 특히 북한에 있는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면 말입니다.

양은경: 많이 사랑하니까 내가 이때까지 먹고 싶어도 과일도 한국에 와서 한 번도 안 사먹었어. 엄마 생각 그리고 딸들 생각이 나서 옷을 사입고 싶어도 안 사입고 엄마를 위해서 사랑하니까 이렇게 돈도 많이 보내는 거야. 엄마를 사랑하지 않으면 돈도 안 보내줘 알지? 하니까 엄마가 사랑하는게 뭐야 이러더라고. 북한에서는 사랑이란 말을 안 쓰거든요. 엄마가 미안하다. 엄마로서 엄마 구실을 못하고 너만 고생시킨다고 이제는 돈도 보내지 말라면서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라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엄마 조금만 참아 이제 통일이 되니까 돈 많이 모아서 엄마 호강시킬께 하니까 엄마가 내가 이제 살면 얼마나 살겠니 아프지 말고 너나 잘 먹고 잘 살라면서…

이렇게 전화통화라도 맘 놓고 할 수 있었으면 또 편지라도 내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은 뉴스에서 남북관계가 좋아졌다는 보도가 있을 때면 실낱 같은 희망이 되지만 대부분 한숨으로 매듭짓습니다.

양은경: 왜 우리는 북한에서 태어났지? 나는 왜 북한에서 태어나서 한국에 와서 부모생각 아이 생각에 미쳐 돌아가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고…

남한생활이 8년이 되다보니 이젠 어느정도 자본주의에 대해 알것도 같지만 처음 대구에 집을 받았을 때는 황당한 사건도 많았습니다. 탈북여성 5명과 같은 아파트 건물에 집을 받아 살 때입니다. 4월이라 남부지방인 대구는 낮기온이 상당히 올라갈 때였죠. 그런데 옷차림은 하나원에서 지급받은 겨울옷. 정착금은 브로커비를 주고나니 얼마 남지 않았고 세상에 공짜는 하나도 없다는 것도 실감합니다.

양은경: 미나리나 민들레는 아무곳에나 많잖아요. 북한 논밭에는 미나리가 많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갔는데 주인들이 나와서 니밭이니 내밭이니 하면서 따지더라고. 그래서 우리가 그때는 북한 말씨를 쓰다보니까 어디서 왔어요? 해서 우리는 한국 사람인데요 하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북한에서 왔습니다. 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사실 돈도 없고 물건 사면서 깍아 달라고 하니까 깍아 안주지 해서 여기 미나리, 냉이 많이 돋아나니까 캤다 하니까 자기들 개인 땅이래요. 여기 한국은 개인 땅이니까 함부로 하지 말래요. 도둑이라는 누명을 쓴데요. 그래서 우리 오해를 해서 옥신각신 했거든요. 산에 가니까 산나물도 하나 없지… 영 눈물이 납디다. 돈 일전 한푼 없지 하니까 하나원 시절이 그립습디다.

남한 사람이 전부 야박하게 군 것은 아니죠. 사정 이야기를 듣고는 일자리를 주기도 했으니까요.

양은경: 처음에 가지따기 오이따기를 하는데 우리가 일 열심히 하니까 주인들이 돈을 원래 5만원 주기로 했는데 10만원 씩 주고 내일도 나올 수 있는가 하고요. 그 돈으로 그때 여름 옷도 사고 신발도 사고 생활필수품을 사니까 좋고요. 목표가 생깁디다. 한 달에 200만원 목표로 벌어 1년에 2천만원을 모으자. 그러면 여기서 엄마에게 얼마 보내고 여기서 필요한 전기밥가마 사고 한 달에 한가지씩 사자. 내가 혼자 사니까 많이 필요없잖아요. 첫째 통장에 돈을 채우자 이런 생각밖에 안듭디다.

생김새도 똑같고 같은 말을 쓰니 사는 곳만 북에서 남쪽으로 이사간다 생각해라 이렇게 쉽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탈북자의 초기정착을 돕는 사람은 3년 정도는 문화충격을 극복하고 살아봐야 마음의 안정을 갖게 된다고 말합니다. 양 씨의 경험을 들어보면 이 말을 이해하기 좀 빠를 겁니다.

양은경: 제가 그런 일이 있어어요. 마트를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었어요. 집하고 똑 같은 1209호에 가서 보니까 개도 있지 아이도 있지 화분도 있지 아니 우리집에 개도 없고 화분도 없는데 금방 다른 사람이 이사를 왔는가 하고 내집이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 주소를 대라는 거예요. 그래서 말했더니 아니라는 거예요. 다른 데로 왔데요. 내가 마트마다 돌아다니면서 한번씩 구경하다가 길을 잃었어요. 그래서 무조건 15층 아파트에 가서 내집이라고 무조건 내놓라고 하고 담당형사에게 전화를 하니까 형사가 집까지 다 찾아주고 그랬어요.

도시는 주택과 상업용 건물로 빽빽하고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합니다. 공짜 물건이 없듯 주인이 없는 땅도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내것도 네것을 구별짓어 놨는데요. 집은 도로명이 있고 그 선상에 있는 집들에 전부 번호가 있습니다. 아파트 역시 도로명에 건물 번호 그리고 집번호가 각각 있답니다. 그러니 번호만 보고 들어가면 남의 집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양 씨와 같이 남한생활을 시작했던 5명의 친구는 어떻게 됐을까요?

양은경: 중국에서 신랑들이 와서 다 잘 살고 있어요. 친구들은 중국에서 산 아이들이라 신랑이 와서 다들 가족하고 와서 잘살고 있어요.

기자: 명절에는 다 모여서 옛날얘기 하고 서로 웃고 그러겠어요

양은경: 설날 추석날 모이면 그 얘기 해요. 그때는 막막하고 우리 이젠 어떻게 살까 하고 앞이 캄캄했어요. 돈이 없으니까 살 수없잖아요. 간장을 사도 그렇고 그릇을 사자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하고 더워서 옷을 사자니 안깎아 주니 눈앞이 캄캄합니다. 지금은 그것이 다 옛날 얘기가 돼고 남의 미나리 밭에 가서 미나리가 저절로 나오지 씨를 뿌리는가 하고 남의 집에 가서 내집이라고 하고 모여 앉으면 그런 얘기 해요. 이제는 옛말이 됐어요.

탈북과정에서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지금도 치료를 받고 있다는 양 씨. 머리에 당한 타박상으로 어지럼증이 있어 직업 찾기가 힘들다고 했습니다. 일을 더 많이 해서 돈을 저축을 하고 싶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시간제 일만 간간히 합니다. 그래도 단체에서 조직하는 모임에는 자주 참석하는 데요.

양은경: 작년에 이북5도민 회에서 안보답사로 천안함 사건 기리는 평택에 가서 저는 혼자서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같은 민족끼리 왜 총질을 해서 저 어린 꽃 같은 청춘이 바다에 수장돼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또 산에 갔는데 물소리 흐르고 아침에 새가 지져기니까 자연에서 막 시를 읊게 되고요. 왜 그리운 부모가 형제가 있는데 가지 못하는가 이런 자작시를 읊게 되고요. 우리가 북한 사람이라고 돈도 안내고 후원단체에서 보내주고 하니까 우리가 뭔데 이런 생각이 들고요. 친부모도 챙겨주지 못한 거 설날이나 스승날 되면 옆에서 챙겨주고요. 내가 혼자 행복하잖아요. 남한에 와서 주변에서 돌봐줘서 행복하니까 왜 나혼자 행복하게 살아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고…

이제는 과거의 기억보다 내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언제가 될지는 기약도 할 수 없지만 좋은 날이 있겠지 하는 긍정의 마음만 가지려 애쓴답니다.

양은경: 나이가 아까워요. 그전에 좀 일찍와서 공부를 했으면 한국 사람들이 북한음식이 담백하다고 좋아 합디다. 내가 돈을 좀 벌고 친구들하고 북한식당을 해볼까 하는 것을 지금 연구하고 있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남한생활 8년차 양은경(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