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열심히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만족하고 살다가 갑자기 바뀐 환경으로 인해 인생진로가 틀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주인공은 북한의 화폐개혁 때 가진 재산을 다 잃고 그 충격으로 탈북해 남한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탈북여성 이은희(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이은희: 2009년 화폐개혁이 있을 때 두만강을 넘기 위해 경으로 갔어요. 정말 어려웠어요. 처음부터 목표를 가지고 떠났기 때문에 고비를 넘어서 이젠 한국에 온지 햇수로 8년이 되네요.
함흥 출신으로 이 씨는 2010년 도강을 합니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어렵게 고비를 넘겼는데 당국의 충격적인 발표로 그나마 가지고 있던 희망도 물거품이 됐습니다.
이은희: 화폐개혁을 함과 동시에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산이 사라졌어요. 한국에 오니까 굉장히 많은 질문을 하더라고요. 북한에서 화폐개혁 하고 국가가 돈을 회수했는가? 말하기도 싫었어요. 왜냐하면 옛날 기억이 떠올라서요. 그것이 발단이 돼서 결국 한국에 오게 됐고.
부자는 아니었어도 먹고 살만했는데 고생해서 번돈을 억울하게 나라에 빼았겼던 박탈감으로 앞이 캄캄했다고 말했습니다.
기자: 그때 얼마를 손해 보신 겁니까?
이은희: 그때 600만원이 있었는데 한집에 10만원씩 바꿔 줬어요. 화폐개혁이 있었을 당시에는 10만원의 가치가 굉장히 컸어요.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 600만원이었는데 하는 생각을 하니..하지만 빨리 결심을 하고 지나간 일 빨리 잊고 가자 해서 여기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북한 돈 600만원은 당시 함흥시 번화가에 집을 두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고 이 씨는 회상했습니다. 미련없이 도강을 해서 3개월 중국에서 한국행을 수소문한 뒤 바로 행동에 옮깁니다. 이제 새로운 곳에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한 겁니다.
이은희: 처음 비행기에서 내려 국정원으로 가는 길에 들었던 생각이 아버지 고향에 와서 감회가 깊었고 아버지 대신 딸이 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길가에 보이는 고층건물을 보면서 내가 하나도 기여한 것이 없는데 나를 받아줬구나 하는 고마운 생각을 했어요. 깊이 알지는 못해도 남한 영화나 비디오를 봤어요. 내가 살던 동해 바닷가에는 텔레비전 파장이 잡혀서 가끔 봤어요. 드라마를 보면서 설마설마 했어요. 와서 보니까 장단점은 있지만 우리를 받아주고 살게 해주니까 고마운 거 아닌가요?
나이 40살에 새로운 땅에서 후회없이 잘 살아 볼까 고민합니다. 우선은 첫 단추를 잘 꿰야 한다고 생각했는데요. 당장 급한불부터 끄는 것이 순거겠죠? 바로 일자리를 찾습니다.
이은희: 처음에 자기고 나온 돈을 브로커 비용으로 다 써서 집 배정 받고 이틀만에 아파트 밑에 있는 치킨집에 알바 구한다고 써있기에 거기서 일을 했어요. 기계처럼 서서 일을 했는데 내가 닭튀긴 것은 아니고 서빙하고 했는데 알게모르게 하루하루 이런 식으로 해선 안되겠단 생각을 했어요. 그래도 하루 돈 벌면 좋아서 집에 오곤 했는데 계속 취직을 하고 싶더라고요. 알바가 아니라 정직원이요. 종로 3가에 북한전통음식연구원이 있는데 거기 일주일 만에 취직을 해서 1년 반동안 월급 받고 그 돈을 모아서 식당하자 했죠. 나의 한국생활은 그렇게 시작됐어요.
치킨집이란 닭을 튀겨서 파는 가게를 말합니다. 알바는 아르바이트를 줄여서 쓰는 남한식 표현으로 뜻은 시간제 일을 하는 직원입니다. 이 씨는 닭튀김 집에서 딱 5일 일하고 일터를 옮깁니다.
이은희: 10시간 일해서 6만인가 5만 5천원인가 받았어요. 그 돈이 굉장히 나에겐 컫어요. 쌀도 사고 신발도 살 수 있고 그렇잖아요. 그 돈으로 뭘 할 수 있을까 물가를 대비 하게 되는데 괜찮더라고요. 돈 버는 재미가 있으니까요.
기자: 일하다가 5일만에 관두신 이유는 뭔가요?
이은희: 내가 아는 북한 요리연구원에서 전화가 왔어요. (일해 달라고) 일이 힘든 것은 다 똑같겠지만 난 계속 회사에 출근을 하고 싶더라고요. 알바가 아니라 정식 직원으로 정장을 입고 회사 출근하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기자: 무엇을 보셨기에 그런 것을 생각하신 건가요?
이은희: 네, 아침에 알바를 하러 나갈 때는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데 출근길에 버스타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다 정장을 입고 있었어요. 북한에서 힘들어서 식당을 안해야겠다 생각했는데 또 그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처음에는 식당일이 굉장히 싫었어요.
지금길 보다는 조금 돌아가더라도 새롭게 시작하는 마당에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일하고 급여를 받아 생활은 됐는데 하루일당 일이 아니라 매일 아침 출근하고 주말과 공휴일은 쉬는 직장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씨는 남한생활이 북한에서의 일상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이은희: 처음 알바해서 돈을 받아서 쉬는 날이었어요. 그 돈을 가지고 시장에 나갔는데 하루 일해서 시장에서 신발을 사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돈의 가치를 알았어요. 북한에서도 돈이 있으면 사먹고 누리고 살잖아요. 그런데 일할 수 있는 곳이 없어요. 여기는 사방에 사람 구한다고 써놨고 한데 북한은 아니예요. 또 거리에 나가면 활기가 있잖아요. 북한은 삶에 찌들어서 배낭메고 왔다갔다 하는 사람을 보는데 여기는 최소한 먹는 걱정은 안하잖아요. 북한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먹는 것을 걱정하거든요. 마음이 아프죠.
제2의 고향 오늘은 함흥출신의 이은희(가명) 씨가 탈북하게 된 사연과 남한에 첫발을 내딛었던 당시 이야기를 들어봤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이 씨가 자기 식당을 차리고 7년만에 음식공장 사장이 된 비결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