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책이나 언론을 통해 어느 나라를 알게 되었다면 간접경험을 통한 것입니다. 반면 직접 가서 체험을 통해 또는 현장을 목격한 것은 사실로 믿게 되는데요. 남한의 현실을 탈북해 가서 직접 살아보니 생각보다 훨씬 자유로운 세상이더라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은 함경북도 출신의 탈북여성 김성란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성란: 일반 군인이 아니라 특전사로 근무를 했고 북한의 일반 군인이 겪었던 그런 생활하고는 전혀 다른 부대에서 군복무를 했거든요.
북한에서 고등중학교 3학년인 15살에 군에 입대해 특수훈련을 받았다는 김 씨. 쉽게 말해 그의 임무는 남한에 침투해 정보를 빼내는 일이었습니다.
김성란: 저희가 소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배우던 것과는 한국 실상이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엄청 놀랐고 그때 나는 뭔가 다른 나라고 꿈과 지향이 있는 나라기 때문에 언젠가 꼭 가보리라는 생각을 해죠. 그런데 생각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눈만 뜨면 우상화 교육하고 정치사상 교육하고 해서 안됐고 8년 4개월 군복무를 하고 정략결혼을 하게 됩니다. 다시 군인가족이 돼서 생활합니다. 북한말로 하면 닫긴구역 즉 외출이 되지 않는 그런 부대에서 신랑이 23년을 군복무를 하고 전역합니다. 전역하고 간 곳이 신랑집이 있는 함경북도 연사입니다. 가니까 진짜 감자만 먹고 쌀이 귀했어요.
평양에서 자신의 군생활 당시 그리고 결혼해서 특별대우를 받으면서 살 때는 몰랐는데 시집이 있던 연사에 가서는 북한의 열악한 실상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한의 경제상황이 이렇듯 엉망이었는지 몰랐던 겁니다. 현실에서 오는 충격 그리고 남편이 간암으로 사망하고 생활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결국 김 씨는 2011년 탈북해 2013년 남한 인천공항에 내립니다. 김 씨가 말하는 남한의 첫 인상입니다.
김성란: 교육만 받고 한국 드라마나 쑈, 영화를 많이 봤습니다. 저희 특전사 교육에 남조선 말 시간이 있습니다. 남조선 말 , 노래와 춤, 적군실태 등 교육을 받았지만 한 번도 와본적은 없잖아요. 그런데 와보니까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저희가 교육받으면서 자료도 보고 비데오를 봤을 때는
좀 더 난잡하고 추잡하다고 할까요? 이런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와보니까 그렇지 않더라고요. 학교 때 배웠던 교육이나 군인으로서 교육을 받았을 때 자료나 신문을 보면 사실은 그 영화에는 더 화려하게 나오거든요. 그런데 와보니까 그냥 사람들이 입고 다니고 꾸미고 다니는 것이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는 낫다고 할까요. 외국 사람들처럼 지지고 복고 그럴 줄 알았는데 인천공항에 내리니까 소박하더라고요. 첫 인상이 그랬습니다.
기자: 소박하다는 의미가 뭔가요?
김성란: 무질서 하고 사람들이 하고 다니는 모습이 상대가 볼 때 민망스러울 것이다 하고 생각했는데 인천공항에 내려 한 30분 앉아 있었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남파교육을 군에서 받으면서 어느정도 남한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피부로 느끼고 보는 모습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김성란: 차가 많다고 했는데 차가 진짜 여기 차인가 아니면 행사하나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기자: 어느 정도 남한을 알았는데도 그런 생각을 했네요?
김성란: 네, 남한을 알았는데도 차가 많아 놀랐고 저는 군인이어서 연애를 못했는데 보니까 남자 여자가 걸을 때 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어깨동무하고 손잡고 가고 전화하면서 가고 먹으면서도 가는 것 보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여긴 더 자유롭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됐고 실제 저 사람들의 내막 생활도 자유롭고 편안할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김 씨가 남한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을 때 그의 나이는 44살입니다. 단독 탈북해서 중국을 경유해 남한에 갔는데요. 다른 여느 탈북자와는 좀 달리 가자마자 남한 남성을 만나 시작은 보기에 비교적 안정적이었습니다.
김성란: 혼자서 우리동네 왔다갔다 국밥집에도 들어가고 북한순대가 생각나서 식당도 가고 시장도 가고 전 혼자 보름정도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내가 뭔가 배워야겠다 생각이 들어서 한식조리사 공부를 합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했는데 4번 떨어지고 붙었습니다. 신랑이 옆에서 내가 떨어질 때마다 공부하는 것을 봐줬습니다. 포기하는가 끝까지 하려는 마음이 있는가를 관찰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신랑이 옆에서 많이 도와줬어요.
독립심이 강했던 김 씨는 우선 남쪽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하고 찾게 됐고 요리사 자격증을 취득합니다. 그 이유가 꼭 식당일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잘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이 요리였기 때문입니다.
김성란: 신랑이 주는 돈만으로 가정생활을 하는 것은 반대입니다. 신랑이 안줘도 내 스스로 경제활동도 하고 싶고 자격증을 따서 직업을 선택하고 싶었습니다.
기자: 현실적으로 당장할 수 있는 것이 요리라고 생각하신거둔요
김성란: 네, 저도 가정주부고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데 한국음식과 북한음식이 달랐습니다. 제가 하는 것이 맛이없더라고요.
기자: 뭐가 틀리던가요?
김성란: 여기도 맛집들에 가보면 지역마다 음식에 양념 넣는 것이 다른데 저희 울산은 바닷가 지역이라 젓갈을 많이 쓰거든요. 그런데 북한은 모든 것이 비싸고 부족하고 하니까 양념을 많이 못 쓰거든요. 그냥 담백하게 조금씩 쓰다가 한국에 와보니까 여기 음식은 설탕을 너무 많이 넣어서 달고 북한에서는 매운 것을 좋아했는데 여기는 그런 맛을 찾아보면 북한에서 먹었던 그맛이 아니더라고요.
일단 생활은 안정이 된 듯 보입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는 북에 두고온 자녀가 늘 김 씨의 마음을 짖누르고 있었습니다. 그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만약 혼자였다면 아이들 생각에 우울증에 더 힘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다행이었는지 그런 투정은 남편이 다 받아줬고 김 씨는 새로운 남한생활에 서서히 뿌리 내릴 수 있었습니다.
김성란: 저희 신랑이 조금 보수적이었습니다. 처음에 신랑 손을 잡고 영화관을 가면 신랑이 손을 쑥 빼고 그리고 햄버거 먹자면서 가면 나는 안 먹고 밥먹자고 하고 그러면 햄버거 먹으라고 신랑이 고집을 피우고 그래서 난 햄버거도 안먹고 영화도 안보고 집에 가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은 다른 사람이 됐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기자: 본인이 다른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남편이 다른 사람이 됐다는 거죠?
김성란: 저도 다른 사람이 됐습니다. 아들 딸이 왔거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북한 특수부대원 출신 김성란 씨의 탈북 정착초기 경험담을 들어보셨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남한에서 첫 직장에서 벌어진 일과 앞으로 계획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