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낯선 땅에서 새출발을 할 때 무엇을 하면서 살까하고 고민을 많이 하게 됩니다. 우선은 자신이 좋아하는 직종을 찾아 기술을 배우고 그 일을 하면서 경제생활도 해결 되면 더 바랄 것이 없겠죠. 오늘은 월급을 받으며 미용실을 운영하는 남한정착 9년의 이경희(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이경희: 북한과 한국은 한반도 같은 나라지만 전혀 다른 나라라고 봐야죠.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나라죠.
겉으로 봤을 때는 구별이 잘 안가지만 몇마디 말을 나눠보면 확연히 들어납니다. 이렇게 같은 것 같으면서 서로 다른 것이 남북한이란 설명입니다.
이경희: 저는 고향이 함경북도로 국경연선에 집이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1997년 대학을 다니다 탈북했는데 그당시가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고 제일 어려운 시기였어요. 집안 형편이 안좋았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오빠랑 살았는데 부모님 고향이 중국이라 북한에는 친척이 없었어요. 저희 형제만 살고 있었는데 오빠 언니가 북한에선 미래가 없다고 해서 중국으로 탈북하게 됐어요.
기자: 본인과 오빠 언니 이렇게 셋이서 탈북을 했군요
이경희: 그때 당시에는 오빠는 데려다 주고 가족을 데리러 북한에 다시 들어갔다가 오빠는 못 오게 되고…
북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대학까지 다녔지만 더 이상 고향에 살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되자 친척이 있는 중국으로 갔고 그곳에서 14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방송을 통해 남한에 대해 알게 됐고 2010년 남한에 갑니다. 이 씨는 남한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신이 살았던 북한은 남한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곳이 분명 이니라는 말했습니다.
이경희: 여기서 살아보니까 생활습관은 한민족이란 것이 느껴지는데 일단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제와서 적응해보니까 이렇구나 하고 느껴지지만 처음 한국인을 만났을 때 전혀 다른 나라 사람같았고 사상이 다르니까…
많이들 하는 질문이 도대체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데 어떤 점에서 남북한이 틀리다는 것인가? 사상과 체제가 틀리면 얼마나 틀린 것이냐 이런 질문을 많이들 하죠. 이 씨 역시 몸으로 직접 체험하기 전에는 그에 대한 답을 명확히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한에 살아보니 알겠더라는 거죠.
이경희: 북한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유치원에서 김부자 생일날 선물을 받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살았고 김부자 우상 교육만 받고 살았잖아요. 저도 탈북하던 97년에 김일성 정일 빼찌를 달고 탈북했어요. 왜냐하면 탈북이 불법이고 가만히 건너왔음에도 불구하고 김부자 빼찌가 내 심장에서 떨어지면 안되는 것으로 알았어요. 그래서 그 빼찌도 달고 왔는데 한국에 오니까 파업을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이었어요. 북한에선 파업도 없지만 위에서 시키는 것만 하면서 살았는데 한국에선 우리에게 안맞는 것이 있으면 파업도 하고 대통령을 상대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이런 것이 북한과 비교가 되고.
탈북해서 중국에서 10년 넘게 살았던 것은 처음엔 남한으로 간다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씨에게 남한은 가서는 안되는 곳이었습니다.
이경희: 제가 북한에서 교과서에서 배웠을 때는 미국놈 한국은 남조선 괴뢰도당이라고 불렀잖아요. 남한 사람만나면 두렸고 무서웠어요. 그런데 중국에 있으면서 관광객들을 만나고 나중에 북경에 살 때 유학생이 사는 곳에 살았는데 유학생들을 보면서 자유가 뭔지 자유로움을 느꼈고 그러면서 한국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구나 하는 변화가 왔던 것 같아요.
중국에서 남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무서운 곳이란 막연한 선입견이 사라졌고 결국 새롭게 뭔가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이 바로 남한이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습니다.
이경희: 저의 경우는 중국에서 이미 한국사람들과 적응 기간을 갖었던 것 같아요. 한국에 와서는 둘째를 낳고 키우면서 대학공부를 하면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기자: 대학에서는 뭘 공부 하셨습니까?
이경희: 저는 심리상당학과를 졸업했어요. 중국에 있을 때부터 관심을 가졌는데 초반에는 아이와의 대화법이라든가 아이를 키우는 문제 때문에 한국에서 하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심리학에 관심을 가졌었고 한국에서 심리학 공부를 했어요. 저는 한국에서 적응이 어렵다는 것은 못느꼈는데 다른 탈북자들은 적응을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이분들을 대상으로 심리상담을 하는 직업을 가져야 겠다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됐었어요.
중국에 오래 살던 탈북자가 남한에 가면 대학에서 중국어 학과를 선택해 졸업하고는 무역일에 종사하거나 통역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씨는 좀 달랐습니다. 일단 아이를 돌보는 것이 우선이었고 그 다음이 생활이다보니 이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던 거죠.
이경희: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까 생계 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일단 미용 기술을 배우면서 심리쪽으로 꾸준히 공부를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미용학원을 다니면서 기술을 배웠어요. 하다보니까 미용은 기술쪽이고 남한에서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정착하는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현재는 미용을 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다져놔야 강사 일도 병행할 수 있고…
기술을 배웠고 월급을 받으면서 가게를 맡아 하고 있습니다. 매일 자신이 직접 운전을 해서 미용실을 가고 하루종일 손님을 받다보면 가게 문을 닫을 때면 몸은 물에 젖은 솜마냥 무겁기만 한데요. 이때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는 때이기도 합니다.
이경희: 긴 하루가 끝났어요. 미용일이다 보니까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면 9시 반인데 저에게 주어진 쉬는 시간이 하루밖에 없어요. 아침에 아이들 학교 보내고 바로 출근하고 하는 생활을 5년 하다보니까 좀 지치는 부분도 있고 한데 이것도 제가 극복해야 하는 시간이고 한데 이런 것이 있어서 긴하루가 끝났어요. 이말을 적었던 것같아요.
매일 아침 9시반에 나가서 저녁 9시에 귀가합니다. 주 6일 일하고 하루를 쉽니다. 특별한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흰머리에 원하는 색으로 염색을 해주고 최신 유행을 따라 여성들의 머리를 멋지게 꾸며주면 모두 행복해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는 이 씨 역시 기분이 최고인데요.
이경희: 그럼요. 잘 왔다고 생각하고 후회는 한 적이 없죠. 한국에 온 내 운명이 고맙고… 지금도 내 힘으로 살 것이고 부지런히 돈을 벌어서 감사한 것도 있고 지금까지 온 것고 감사하고 노력한 것만큼 내가 얻을 수 있다는 것도 고마운 것도 같아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과거. 하지만 다시 한 번 원하는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그러고 싶진 않습니다. 그동안 겪어 왔는 시간이 너무 힘들었던 탓이죠. 꿈과 계획이 있기에 오늘에 감사하고 내일이 기다려 집니다.
이경희: 저요, 올해 안에 제 가게를 내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미용일을 하는 이경희(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