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가족

서울 중구 명동의 한 환전소 앞에 위안화, 달러 환율이 표시된 안내판이 놓여있다.
서울 중구 명동의 한 환전소 앞에 위안화, 달러 환율이 표시된 안내판이 놓여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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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사는 탈북자들은 자신보다 북한에 남겨둔 가족을 우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송금하고는 자신은 최소한의 생활비만으로 사는 분도 많은데요. 오늘은 함경북도 무산군 출신의 이민경(가명) 씨의 이야기 입니다.

이민경: 뭐가 살면서 제일 힘든가 하면 외로움이에요.

현재 70대 중반을 바라보는 이 씨는 홀로 탈북해서 중국을 거쳐 남한에 정착했습니다. 어느덧 남한생활도 16년이 됐습니다. 이 씨는 그 동안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모두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하며 살았습니다. 이 씨가 가족과 헤어지게 된 것은 어려운 생활 때문이었습니다.

이민경: 저는 1998년에 탈북했는데 그때 한참 고난의 행군 시기인데 중국에 와서 좀 돈을 벌자고 해서 왔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요. 그리고 그 이듬해인가 선거였는데 몰랐죠. 이북은 선거에 안 참가하면 나쁜 사람으로 취급한다고요. 그래서 다시 건너 가려던 것이 못되고 그냥 중국에 있었습니다.

북한으로 되돌아 간다고 해서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국에 남습니다. 자신만 희생을 하면 북에 남은 가족은 최소한 식량걱정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권하는 한국행도 거절했던 겁니다.

이민경: 저는 중국에 넘어오자 마자 한국에 가라는 사람이 많았어요. 보는 사람마다 한국에 보내준다 했는데 내 생각에는 한국에 가면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지장을 줄까 봐 망설였다고요. 다 포기하고 한국에 올 궁리 안하고 중국에서 돈 벌어서 가족에게 돈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중국에서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요.

당시 중국에선 많은 탈북자들이 강제북송을 당했습니다.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숨죽이고 살수밖에 없었는데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병까지 얻게 됩니다. 혈압이 갑자기 올라가고 나중에 풍까지 맞았지만 제대로 된 치료는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민경: 그때 내가 일하는 곳에서 한국에서 온 탈북자분을 만났어요. 그분이 하는 말이 한국가면 중국보다 좋다고 하더라고요. 국적도 주고 일하면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남조선에 가면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지장이 없는가 하고 물어보니까 자기 신분을 노출 안 시키고 조용히 살면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돈을 많이 가져와서 북한에 보내줬는데 그분이 하는 말이 중국에서 1년 버는 돈을 한국에서는 한 달이면 벌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봐 생각하지 않았던 남한행을 이제 신중하게 고려하게 됩니다. 게다가 한국에 가면 병도 치료할 수 있고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는 더 큰 돈을 보낼 수 있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죠.

이민경: 그때 당시는 중국에서도 벌면 얼마든지 먹고 살수 있고 작은 돈이라도 가족에게 보내줄 수 있으니까 그냥 살려고 했는데 한국에서 온 탈북자가 보내주는 돈을 보니까 내가 보내는 것에 20배는 되더라고요. 그래서 몇 달을 번 돈인가 물어보니까 한달 번 돈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나도 한국 가서 벌어야겠다 하는 생각에 오게 됐습니다.

이 씨가 남한생활을 시작했을 당시 나이가 60살이 넘습니다. 낯선 환경에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기엔 적은 나이가 아니었죠. 가족이라도 있으면 의지가 될 텐데 혼자 모든 것을 헤쳐 나가야 했기 때문에 어려움은 더했습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도 없었답니다. 왜냐하면 이 씨의 마음에는 오로지 북한에 있는 가족생각뿐이었으니까요.

이민경: 한국에 오니까 처음에는 일하자니까 힘들더라고요. 북한에선 사무직을 했는데 한국에 오니까 나이 때문에 그런 직업은 할 수 없고 막노동 일밖에는 없더라고요. 그래도 일해서 돈을 벌자고 가정집 청소도 해보고 건설일도 하고 나무 심는 일도 하고 닥치는 데로 했어요. 그런데 한국은 뭐가 좋은가 하면 중국에서는 반년을 일하고 돈을 주라고 하니까 로반을 잘못 만나서 죽을 만큼 맞기도 했어요. 그런데 한국에 오니까 그런 것은 없더라고요. 집도 주지 먹고 살고 하는 데는 지장이 없더라고요. 나만 열심히 하면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더라고요.

처음 남한생활 10년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만 했습니다. 그래서 별다른 기억도 없는데요.

이민경: 그때 당시는 내가 생각을 잘못 한 것이 학원 다녀서 기술을 배워야 하는데 오직 돈 벌 생각만 하다 보니 새벽 4시반에 나가서 밤 10시 들어오고 했어요.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그때 컴퓨터 공부도 하고 한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 준비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 때늦은 후회죠.

기자: 지금은 어떻게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십니까?

이민경: 한국은 만 65세만 되면 수급자 대우를 해줘서 먹고 살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컴퓨터 학원도 다녔고 컴퓨터를 배워서 봉사도 하고 한국 와서 배려를 많이 받았으니까 지금은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어요.

기자: 컴퓨터는 언제 배우신 겁니까?

이민경: 67살에 컴퓨터 학원을 다녔어요. 저는 학원에 가서 처음부터 포토샵을 배웠어요. 그런데 마우스를 움직일 줄도 모르고 키보드도 하나도 모르고 너무 한심하니까 선생님이 어르신은 한글타자부터 배우고 하세요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선생님 저는 뒤에 앉아서 설명만 듣고 공부하는 사람들한테 지장 안줄 테니 그냥 두세요 이랬어요. 그리고는 선생님이 시간이 날 때 문의를 하고 해서 한달 지나서는 좀 알겠더라고요. 거기서 사진 찍어서 블로그에 올리는 것을 거기서 배웠다고요.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컴퓨터 학원이라 공부가 끝나면 밤 10시인데 그때 또 아는 사람 집에 가서 모자란 것을 배우곤 집에 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는 학원에서도 포토샵 강의에 연령제한을 두지 않고 원생을 받게 됐습니다. 이 씨의 열정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데요.

이민경: 저의 천성이라고 할까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에는 정말 집중을 한다고요. 지금은 탈북자 단체에서 홈페이지 관리를 하면서 사진 올려주고 홍보하는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남한생활의 최대 고비 그 여파는 3년간 지속됐는데 이제 모두 정리가 됐습니다.

이민경: 오직 돈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다가 2015년에 다단계에 돈을 넣었다가 다 날렸어요.

기자: 처음 10년은 쉬지도 않고 일만 하셨으면 돈도 꽤 모으셨을 것 같은데요.

이민경: 무조건 북한에 돈을 보냈어요. 매년 보냈어요. 그러다 나중에 쓸 돈을 모으자고 하다가 2015년에 사기를 당했죠. 게다가 남의 돈까지 끌어다 넣었다고요. 그래서 그 돈을 갚자고 고생했죠. 빌련 돈을 다 갚고는 좀 마음이 가볍더라고요.

이제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면서 즐거움을 찾는 이 씨는 건강을 위해서도 시간을 쪼개 쓰고 있습니다.

이민경: 여가 활동은 동에서 조직하는 스포츠 댄스를 일주일에 세 번 가고 또 라인 댄스를 일주일에 다섯 번 하루에 한 시간씩 가고 그것으로 운동을 하죠. 그리고 봉사활동하고 하면서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 안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민경 씨. 이 씨의 마음에는 늘 북한에 있는 가족이 함께 하고 있답니다.

이민경: 지금도 돈을 조금씩 모아 북한에 송금하면 그것이 다 전달이 되는지는 모르겠어요. 사기 당해서 3년동안 빚을 갚느라고 돈을 못 보냈는데 그때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그래도 지금은 조금이나마 보내주고 나면 부모로서 도리는 했다 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제 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이민경(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