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다리, 다시 태어났어요

0:00 / 0:00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젊은 때는 사서도 고생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면서 노후를 준비하는데요. 막상 노인이 되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마음은 청춘인데 몸이 안따라준다. 너무 젊을 때 고생해서 몸이 망가져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 하는 거죠. 오늘은 최근 무릎관절 수술을 받고 다시 태아났다는 탈북여성 이순희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이순희: 저는 관절 내시경이란 수술을 받았어요. 원상태로 가려면 한두달은 더 있어야 할 것같아요. 그래도 더 좋아질 다리를 생각하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함경북도 청진 출신의 이 씨는 2006년 탈북해 이듬해부터 남한생활을 했습니다. 북한에서 40대부터 10년간 행방을 다닌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순희: 진짜 다리가 너무 아프니까 우리를 도와주는 단체에서 저를 데리고 전문병원에 갔어요. X-레이 찍는 것이 정말 다르더라고요.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당장 수술받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해서 바로 다음 날 수술에 들어간 것이죠. 두 다리 중에서 심한 것이 왼쪽 다리였어요. 앉았다가 서면 푹 무너지더라고요.

기자: 다리는 언제부터 아픈 겁니까?

이순희: 원래 북한에서부터 아픈 거예요. 거기서 행방을 많이 다녔거든요. 도시에서 공업품 물건을 가득 지고 장마당이 없는 산골에 가는 거예요. 가져간 것을 주고 시골서 나는 생산물이나 강냉이, 콩, 감자 많이 나오는 대홍단에 가면 녹말이 있는데 이런 것을 우리가 가지고 간 옷이나 맛내기나 이런 생활용품을 주고 녹말가루로 바꿔 오는 거예요. 농산물이 도시에 오면 비싸게 팔거든요. 마대 하나가 옥수수는 부피는 있어도 콩보다 무게가 안나가서 한 30-40Kg 정도인데 콩은 무게가 50Kg 정도 나가요. 그것을 역전에 가져가서 또 자동차 오면 위에 올리자니 둘이서 한명은 차에 올라가고 한명은 위로 올리고 이렇게 계속 무겨운 짐을 가지고 생활전선을 헤매다 보니까 특히 무릎을 상한거예요.

북한에서 장거리 달리기 또는 행방이라고 하죠. 장사를 하러 다닐 때는 나이도 젊었고 먹고 사는 것이 급선무라 몰랐는데 환갑의 나이가 되다보니 젊을 때 무리했던 것에 후유증이 나타난 겁니다. 이제는 거동이 불편해 정상생활이 어려운 지경에까지 돼서 수술을 받을 수밖에 방법이 없었던 겁니다.

이순희: 관절 내시경이란 수술은 수술 부위를 개복하지 않고 작은 구멍을 내서 한쪽은 수술 도구를 넣고 한쪽으론 수술할 수 있는 내부를 보면서 하는 수술이더라고요. 수술 자리에 작은 점밖에 없더라고요. 꿰매는 것도 네바늘밖에 없더라고요

이제 남한생활도 거진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10년이 되는데요. 그동안 육체노동은 아니어도 노인을 보살피는 간호조무사 업무가 많이 움직이는 일이어서 힘들었지만 무릎이 잘 버텨줬는데 올해들어 한계점에 다달은 겁니다.

이순희: 남한에서는 간호조무사 일을 해서 무거운 짐을 지는 일은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어르신들을 돌보다 보면 계속 왔다갔다 해야해요. 혈압도 재고 맥박도 재고 하니까 하루 50명을 재야해요. 열심히 하다보니 안 좋았던 다리에 무리가 간 것이예요. 병원에 가서 연골 주사를 맞았는데 연골에 윤활류를 주는 거죠. 우리는 의료급여 1종이라 혜택을 줘요. 보통은 한대에 5만원인데 우리는 무료라 계속 치료를 받은 거죠. 그러다 더는 지탱을 못한다면 의사가 수술을 권했고 그래도 좀더 버티자 했는데 더는 미룰 수 없어 한거죠.

기자: 왜 관절 주사를 맞으면서 견디셨어요? 바로 수술을 받지 않고요?

이순희: 견딜만 하니까 견디죠. 주사를 맞으면 몇 달은 가요. 1년에 두번을 맞아 견딜수 있었는데 나이가 60대가 되니까 안되더라고요. 연골이 더 얇아지고 주사 효과가 없더라고요. 의사 선생님이 더는 안되겠으니 수술을 받으세요 하면서 전문 병원에 소개를 해주더라고요.

이번에 수술을 받고는 솔직히 병원비 때문에 걱정이 됐답니다. 그런데 정작 수술이 끝나고 눈을 떴을 땐 내가 남한에 있어 다행이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이 나오더랍니다.

이순희: 저는 병실에서부터 수술실 도착할때까지 누워 있으면 수술실에서 본인 확인하고 마취를 해요. 저는 다리 수술이라 척추에 하반신 마취를 하고 위는 잠자는 주사 약을 놓으니까 전혀 몰라요. 나중에 환자분 환자분 불러서 정신을 차리니 다했다는 거예요. 그때 무슨 생각이 났는가 하면 이북 생각이 나더라고요. 제 동생 시어머니가 갑자기 병원에 실려갔는데 급성맹장이라 당장 수술을 하는데 그때 정전이 된 거예요. 동생 남편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달려오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니까 수술하다 정전이 됐는데 가족보고 대책을 세우라고 했데요. 그래서 카아이트 불을 준비해서 냅다 뛰어가더라고요. 그 불빛으로 수술을 받은 거예요.

1995년 가을 북한에서 동생 시어머니가 겪은 일이 떠올랐던 겁니다. 그리고는 당장 치뤄야 하는 병원비 걱정이 됐는데요.

이순희: 옆에 있는 여자는 나하고 똑 같은 수술을 받았는데 500만원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일주일이 넘었는데 퇴원해서 집에서 안정 취하다가 오라는 날 오세요 하면서 정산합시다 해서 원무과에 가니까 원래는 350만원인데 저는 의료급여 1종이라고 120만원만 내면 된데요.

남한의 의료혜택 덕을 톡톡히 본 것인데요. 이제는 한결 가벼원진 마음으로 회복에 전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순희: 처음에는 수술이 잘될까 했는데 수술 받고는 원장선생님이 수술 집도를 했는데 회진 하면서 수술이 잘 됐습니다 하고 말씀 하실 때 얼마나 좋고 기쁘든지 그 모습을 보고 좋은 모습으로 잘 살아봅시다 이랬어요. 그분도 내가 북한에서 온 것을 알거든요. 이젠 고생하지 말고 건강한 다리로 잘 살아보세요 이러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나이를 먹으면서 멀쩡하던 몸도 예전 같지 않게 말썽을 부리게 마련입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다음날이면 근육통이 오고 왜이리 삭신이 쑤지나 할 때 있습니다. 그런데 수명을 다해 정상기능을 못하는 것과 그 아픔을 가지고 계속 살아야 하는 것은 다른 문제죠.

이순희: 제가 이때까지 20년나마 고통을 받다가 이젠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드는 겁니다. 이젠 내가 다리아픔을 모르니까 막 뛰어다닐 수도 있다. 솔직히 전에는 다리아파서 가고 싶은 곳도 못갔어요. 성한 사람들 따라가지 못하면 어쩌나 해서 어디 가자해도 안갔거든요. 그런데 이젠 외국 여행도 마음껏 갈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다 해서 좋았어요. 이제는 이 다리로 나는 새로운 생활 새로운 세계를 더 살아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아픈 다리 수술을 받고 현재 재활 치료 중인 탈북여성 이순희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