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놀이마당에서 열린 '사랑의 송편 빚기'행사에서 다문화 주부, 주민 등이 오색 송편을 빚고 있다.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놀이마당에서 열린 '사랑의 송편 빚기'행사에서 다문화 주부, 주민 등이 오색 송편을 빚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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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소원이 하나씩은 있을 겁니다. 물론 보통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겠지만요. 오늘 소개할 주인공은 탈북해서 남한으로 가 사랑하는 가족을 지켰다고 말하는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조경호 씨 입니다.

조경호: 얼굴에서 항상 웃음꽃이 피는 그것이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조경호 씨는 기자와 전화통화를 한 그날 밤 보통 때와 마찮가지로 가족과 함께 텔레비전을 본다고 했습니다. 경호 씨는 지난 2004년 8월에도 RFA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는 “자식이 커가는 것이 한편으로는 든든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겁이나요. 아버지로서 아버지 구실도 못하고 애를 학교에도 못 보내고 여기까지 오게 하는게...이제는 성장 시기도 다 끝나가잖아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잠시 당시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아들은 15살, 딸은 17살이었는데요. 탈북해서 중국 공안에 잡혀 강제북송을 당한 후 온 식구가 온성 보위부 감옥과 무산군 안전부 등에서 고초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재탈북에 성공해 모스크바에서 아이들과 헤어지게 됩니다. 먼저 남한에 간 조경호 씨가 아이들과 헤어진 후 2년만에 남한에서 재회를 하고는 그때 심정을 말했던 겁니다. 이제 딸은 장성해 시집을 갔고 아들은 조만간 결혼을 시켜야 겠는데 사정이 좀 여의치 않아 걱정이랍니다.

조경호: 우리 사정이 되면 보내줘야죠. 남이 귀하게 키운 딸을 그냥 데려오면 안되잖아요. 한 5년 만난 것 같습니다.

기자: 2003년 남한에 도착하기 전 강제북송도 당했고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남한에 입국하셨는데 그때를 돌이켜 생각하면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조경호: 그것이야 솔직히 말해서 자유를 찾아 온 것 아닙니까? 북한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자유이지 않습니까. 애들은 내가 겪은 환경이 아닌 곳에서 키우려고 집사람과 떠난 것인데…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갖을 수 있는 곳에 왔으니 저는 행복하죠.

자식들에게 좀 더 나은 환경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고 말하는 경호 씨. 북한에서는 소처럼 매일 열심히 일해도 대가는 차려지지 않았고 건강마저 잃게 되자 더 이상 무산에서 살 수가 없었답니다.

조경호: 우선 첫째 김부자의 우상화. 그 사람이 만들어 놓은 법, 모든 사람은 그 우상화에 따라 움직이니까. 자유라는 것은 없죠. 내가 떠는 것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한 길이었어요. 그때 당시 직장을 나가서 일해야 하는데 그렇게는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병원생활을 북한에서도 많이 했어요. 우리는 아무리 아파도 직장에 가야 해요. 완쾌가 안돼도 가야해요. 직업이 당시 건설업이었어요.

기자: 그때 당시라는 것은 언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조경호: 1992년 일거예요.

1990년 초반에 탈북했다면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기 전인데요.

조경호: 1993년 중국에 갔어요. 그때는 그냥 혼자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볼까 해서 갔다가 북한에 돌아갔죠. 그리고 북한에서 다시 떠날 때 집사람을 데리고 가족과 떠났어요.

천신만고 끝에 남한에 도착했을 때도 그리 건강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중국에서 강제북송 당해서 그리고 남한행을 하는 과정에 몸을 돌보지 못했던 후유증이 조 씨를 괴롭혔습니다.

조경호: 처음에 여기서 내가 쇼크 상태에 빠진적이 있었어요. 늑막염이라고 배에 물이 차는 병을 앓았어요. 너무 안 좋아서 쇼크 상태까지 갔다가 많이 좋아졌어요.

기자: 완치가 됐습니까?

조경호: 완치가 안되는 병이랍니다.

기자: 북한에서부터 있던 병이었나요?

조경호: 다시 북송돼서 내가 맞아서 생긴 병입니다.

1년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구타를 당했던 것이 평생 장애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기자: 이젠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남한생활 불편함 없이 괜찮으신가요?

조경호: 생활하는 것에는 우리가 일하면서 자유롭다는 것이 솔직히 말해서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내가 열심히 일하면 보상이 있잖아요. 그런데 북한은 없습니다. 여기와서는 사람을 많이 만나야 사는 맛이 날 것 아닙니다. 여기서는 많은 사람이 나를 알고 도와주고 있습니다.

16년을 살면서 크게 돈을 모은 것도 아니고 내세울 것은 없지만 인간관계는 잘 맺었다는 조경호 씨. 사람을 보면 항상 웃는 낯으로 대하고 진실하게 상대하다 보면 절대 손해보는 일은 없다는 겁니다.

조경호: 사람 사는 세상은 똑같습니다. 북한이나 남한이나 똑같습니다. 인간세상이 사기치는 것도 있고 반대로 예의 지켜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런데 사기치는 사람보다는 도와주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기자: 행복했던 순간은 어떤 때였습니까?

조경호: 많지요. 때로는 말 한마디가 힘이되는데요. 추석인데 너 뭐하냐? 우리집에 오라. 그말을 했을 때 말한마디가 천금을 주고도 못 사요. 아이를 데리고 자기집에 놀러오라고 했을 때는 그게 지나가는 말이라도 얼마나 고마워요.

그리고 오늘 이순간 가장 감사한 것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남한에서 자유를 누리며 배고프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조경호: 내 가족을 지키고 가정을 지킨 것이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우선 첫째 집사람에게 고맙고요. 집사람이 없었으면 가정도 이만큼 안됐겠죠. 둘이 손잡고 왔으니 이렇게 된 것이겠죠.

건설일을 하다가 이젠 육체노동을 쉬고 친구가 하는 사업장에 나간다는 조경호 씨. 큰 욕심 내지 않고 항상 가족의 얼굴에 웃음 꽃이 지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조경호: 나는 딴 것 없습니다. 집사람이나 저나 이제는 나이도 들었고 그저 온가족이 오손도손 아이들만 잘 된다면 되죠. 큰딸은 시집갔으니까 행복하게 잘 살면 좋고요. 남들에게 손가락질 않받고 평범한 일상 주민으로 살 수 있으면 되지 별다른 것이 없잖아요. 행복하게 살고 사회생활에서 법을 지키고 사는 그런 아이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무산 출신의 조경호 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