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에서 내과 의사로 오랬동안 활동했던 이가 있습니다. 생활고 때문에 탈북을 했고 현재 남한에서는 화장품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요. 이 여성은 자신의 원래 직업인 의사의 꿈을 남한에서 꼭 이루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함북 온성 출신의 한호영(가명)씨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한호영: 제 인생 자체는 도전의 연속이라고 생각하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생관입니다.
한 씨는 북한에서 내과 의사로 20년을 근무한 의료인 입니다. 하지만 북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장사를 했고 주로 술과 담배 사탕과자 북한명태를 파는 가게를 운영하면서 직원도 두고 한때 돈도 꽤 벌었습니다. 그런데 장사가 잘된다는 소문이 돌고 결국 비사회주의로 몰려 한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됐죠. 북한에 계속 있다가는 꼼짝없이 감옥살이를 하게 됐기에 탈북해서 중국을 거쳐 2013년 남한에 입국합니다.
한호영: 한국에 오면서 생각한 것은 가면 다시 공부해서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남한에 와보니까 의사를 하는 탈북자도 많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내가 43살이었는데 당장 생계도 바쁘고 북한에 자식도 두고 와서 그쪽에 돈도 보내줘야 했기 때문에 공부할 생각을 못 하고 일부터 시작했어요. 처음에 화장품 용기를 조립하는 회사였는데 하루 6천개에서 1만개까지 제품을 조립하는 단순작업 일이었는데 너무 힘들었지만 나중에 숙련되니까 괜찮아졌는데 그 회사가 부도가 나서 없어졌어요. 그 다음에는 회사가 밀집돼 있는 식당에서 1년을 일했어요.
북한에서도 의사였으니 남한에 가면 당연히 의사가 돼야겠다는 맘을 먹었지만 현실에 걸림돌이 많았습니다. 당장 급한 것은 생활이었기 때문에 일을 해서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했는데요. 그런 과정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한호영: 일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이 언어가 안통하는 거였어요. 억양 때문에 혹시 물건을 사러 가서도 떨리고 얘기 하는 과정에 북한말을 안쓰려고 노력을 해도 대화가 길어지다 보면 북한말투가 나와서 자꾸 중국에서 온 교포인가 물어봐서 많이 떨리고 해서 당황했어요.
이제 남한생활이 5년이 됩니다. 처음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요? 그동안 앞만 보면서 달려온 시간이었다면 이젠 살아온 세월도 되돌아볼 수 있게 됐습니다.
한호영: 한국에 오니까 너무 모든 것이 풍요롭고 북한에 있을 때보다 누리는 것들이 많잖아요. 북한에 있을 때처럼 오라가라 하는 곳도 없고 내가 결정을 해서 취직을 하고요. 북한에선 밖에서 나무를 해와서 쪼개서 불떼고 밥을 해야 하는데 여기는 전기가 24시간 들어오죠. 밥솥 다 있죠. 가스가 있죠 하니까 주방에서 너무 편했고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것은 전기가 들어오는 것 집에 와서 물이 나와서 언제든지 씻을 수 있는 것 또 대중교통이 너무 잘 돼있어서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이요. 구속 받는 것도 없고요.
기자: 남쪽에 와서 긴장이 풀리고 해서 병이 오고 치료를 받으면서 느끼는 것이 있었을듯 한데요.
한호영: 네, 제가 병원에 갔는데 느꼈던 것이 여기는 MRI,초음파 등 설비가 우월했고 북한에서는 환자 병력서를 제가 들고 다니면서 과에 가서 치료받고 처방을 내서 약을 받고 했는데 여기는 의사가 진단을 하고 전산으로 처리하더라고요.
여러 일을 하면서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돈도 보내주고 남한생활에도 큰 문제는 없었지만 늘 마음 한구석 허전함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의사가 되려면 국가자격증 시험도 치뤄야 하고 준비가 필요한데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건가 이런 생각이 문뜩문뜩 들었던 겁니다. 그리고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지만 마음껏 누리질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한호영: 처음에는 무슨 생각을 했나하면 그쪽에 가족을 두고 혼자 왔거든요. 혹시 나로 인해 내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서 그냥 집과 회사만 왔다갔다 하면서 조용히 살자 했어요. 그래서 주변과 교제를 하지 않다 보니까 내 스스로를 나를 울타리에 가둬놓는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까지 겁을 먹고 살아야 하나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주변을 조금 둘러보기 시작했더니 단체들에서 많이들 놀러들 가고 다니더라고요. 저는 교제를 안하니까 전화번호도 모르고 찾아주는 곳이 없었어요. 그러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인터넷을 통해 같은 처지의 탈북자들과 친목단체를 만들어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생활은 변했습니다. 많은 사람과 교제를 하게 되고 정보를 나누면서 생활영역이 넓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화장품 제조업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한호영: 초기에 품었던 의지가 내 인생 무조건 여기서 공부를 해서 의사가 되자 그런 꿈이었는데 아직 실현을 못하고 꿈하고는 다른 쪽으로 일하고 있는데 사실 화장품 제조업체 상임이사로 근무하고 있는데 이렇게 일하자면 학력이 있어야 해요. 북한의 학력이 인정이 돼서 지금 제조업체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 지금 유통망을 구축하고 수출 출로를 개척하고 면세점에 제품이 입점되면서 새로운 희망이 생기더라고요. 이쪽으로 뭔가 될 수 있겠다 하는 느낌이 있어요.
이제 걸음마 단계인 화장품 생산 회사지만 계속 거래처를 확대해 가면서 생산량이 늘고 있습니다. 여성으로서 늘 관심을 갖던 분야여서 일하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답니다.
한호영: 북한에 살결물 하고 크림 이 두 종류만 발랐거든요. 그리고 피아스 크림을 썼는데 여기는 종류가 많아요. 그때 제가 있을 때만해도 이런 것 바르고 살짝 분바르고 하면 화장이 끝인데 여긴 다양하죠. 지금 여기서 만드는 것은 스킨, 로션, 에센스, 영양크림 아이크림 이런 것이 다 기초 화장품인데 이런 것을 만들고 샴푸, 마시크 팩 등 6종을 생산하고 있어요.
처음 남한생활을 시작했을 때문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요즘은 회사가 커가는 모습에서 힘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접지 않은 의사의 꿈을 향해서 자신의 좌우명 처럼 계속 도전하는 삶을 살겠다고 말합니다.
한호영: 앞으로 이 화장품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만드는 것이 목적인데 아직 꿈을 놓지 않고 있으니까 한의원을 차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꿈을 향해 달려가죠. 그리고 우리 물건이 세상에 알려져서 명품 화장품으로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화장품 회사에서 일하는 한호영(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