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아무런 노력없이 이뤄지는 것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계획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데요. 때로는 생각했던 것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낭패를 보고 인생행로가 180도 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주인공은 탈북아닌 탈북으로 오랜 중국생활을 거쳐 현재 남한에 살고 있는 함북도 출신의 차명희 씨 입니다.
차명희: 한 번 도망치고 또 도망쳐도 팔려가고 하니까 결국 거기에 정착을 하게 됐죠.
함경북도 출신으로 지난 1998년 10월 중국으로 갔던 차 씨는 탈북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30대 초반으로 군인가족으로 있었는데요. 정말 멋진 일을 해내려는 충성의 마음에서 길을 떠난 것이 결과적으로 인생을 꼬이게 만들었습니다.
차명희: 12월에 김정일이 6군단에 현지지도를 온다고 했어요. 가족공연까지 보겠다는 친필말씀까지 있었어요. 12월 27일이 우리 헌법절인데요. 공연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연습중에 피아노가 고장이 났어요. 그래서 제가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나서면 내가 김정일을 직접 만나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돈을 투자해서 피아노를 사오자 하는 목적에서…
구입하려고 했던 피아노는 보지도 못했고요. 중국 땅에서 팔려 다니는 허망한 신세가 됐습니다. 그런 현실이 너무나 참담해 세상을 등지겠다고 모진 행동도 여러번 했지만 결국은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그리고 생활이 달라졌죠.
차명희: 중국에서 살면서 한3년을 말을 안했습니다. 거기 조선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요. 중국말을 수첩에 적고 하면서 배워서 말을 할 수 있었고. 내 성격이 꽁한 성격이 아니라 개방돼서 다른 중국사람과 말이 통하면서 친숙하게 지냈습니다. 한국 들어오기 7년전부터 제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서 여맹위원장을 하면서 친구가 화장품 매대를 했는데요.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화장품도 많이 팔고 보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보험회사에서 사람들을 많이 가입시켰다고 한국으로 관광을 시켜준 거예요. 중국 관광객으로요.
남한에 간 것은 마지막 선택이 아닌 관광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고는 더 이상 중국에 미련을 두지 않고 아주 남한에 가서 살자고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차명희: 관광객으로 일주일 있으면서 내가 생각했던 곳이 아니구나. 눈을 판다. 피를 판다. 그렇게 무섭게 생각했던 곳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다시 중국에 가서 한국에 와야겠다. 나도 나이가 들고 내가 조선땅을 밟을 수 있는 길은 이것이구나 해서 다시 한국에 오게됐습니다.
태어나 30년을 북한에서 살았고 그후 15년을 중국에서 지내면서도 남한에 가야한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처음 경험한 일주일 동안의 남한생활이 차 씨의 마음을 빼았었던 겁니다. 여러 가지가 차 씨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는데요.
차명희: 한국에 와서 관광할 때 첫째 삼계탕을 먹었습니다. 이게 뭐지? 이런 생각을 했고 화장실에 갔는데 다 화장지가 있었습니다. 중국에는 고급호텔에 가도 화장지가 없어요. 한국말을 들어보면 차분차분하고 내 맘에 쏙 들어왔어요. 화장품 매대를 갔을 때는 안내원에게 물어봤어요. 세계사람들이 여기 와서 사가는 거예요 했더니 그렇다는 거예요. 가는 곳마다 한마디 한마디가 내 맘에 폭폭 들어왔어요. 어쨌든 나의 마음은 다시 한국에 와야겠다는 마음으로 완전히 180도 돌았어요.
탈북자 신분이 돼서 남한에 갔을 때는 정말 빈손으로 시작했습니다.
차명희: 9평 집을 받았는데요. 그때 당시는 혼자라 진짜 컸어요. 그런데 지금은 꽉 차보이고 그때 당시는 그 집이 너무 컸어요. 이 집을 언제 다 채우나 했었는데 3년 어간에 다 채웠습니다.
남한에 가서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도 했는데 무엇을 해야할지 정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차명희: 한 보름정도 집에 있다가 목사님 소개로 평택에 건설되고 있는 삼성반도체 건설 근로자로 취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원에 있을 때 말씨가 다르기 때문에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교육을 많이 받았습니다. 결론은 남한사람은 영어를 많이 쓰고 우리가 사는 생활습성이 좀 달라요. 여기는 평온하게 생활하지만 저희는 툭툭 내쏘고 이런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결론은 환경에는 환경의 지배를 받아라 그것이 답인 것 같아요.
정말 먼길을 힘들게 돌아온 느낌이지만 이제는 마음의 평화도 찾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차명희: 제가 행복감을 느끼고 긍지감을 느끼고 내가 사람답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현장입니다. 처음 일할 때는 말라서 뼈다귀만 있었는데 일하는 분들이 저에게 핫팩을 줬어요. 그게 뭔가 하면 손시리고 발시리고 할 때는 넣어라 해서 그것이 고마웠어요.
기자: 겨울에 손난로 식으로 흔들면 열이 나서 손을 녹힐 수 있는 건데요.
차명희: 네, 맞아요. 그 물건 하나가 저에게는 많은 감동을 줬어요. 힘이 났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민주주의 한국에서는 사람을 먼저 생각한다. 구호마다 당신이 안전하지 않으면 작업을 하지 마세요. 먼지 없는 깨끗한 현장에서 우리 같이 일합시다. 사람이 우선입니다. 안전거리는 당신의 생명입니다. 이런 구호가 가는 곳곳마다 다 붙어 있습니다. 내가 일하고 돈을 받는 것만해도 긍지스러운데요. 가는 걸음마다 나를 위해 나의 인간 존엄을 안겨주는 이런 구호를 나는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뒤돌아 보지 않고 과거의 생활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매일 직장에 출근하면서 힘찬 발걸음을 옮겨갈 뿐입니다.
차명희: 저는 이제 한국에서 그누구보다 당당하게 살고 있습니다. 3년밖에 안됐는데 31명을 책임진 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1만7천명이 삼성반도체 건설업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하는 일은 건물 안에 소방시설을 설치하는 겁니다. 큰 집 한채에서 내부일을 하는데 저의 경우는 소방시설 설치 다른 분들은 배관, 철골을 하는데 건설 공정에 따라 일을 합니다. 힘들기는 힘들어요. 새벽 4시반에 일어나서 화장하고 나가는데 집에서 현장까지 가는 거리는 차가 밀리지 않으면 15분이면 가는데 너무 차가 밀리니까 저는 정확히 집에서 아침 5시면 떠납니다.
시간은 나의 길잡이, 양심은 나의 얼굴, 사랑은 나의 힘이다라고 말하는 차명희 씨. 열심히 일해서 더 큰집으로 이사도 갈 계획이고 현재 생활에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차명희: 저는 이대로 나갈 겁니다.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시작이거든요. 설사 건설일이라고 해도 저는 이곳에서 인정을 받았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고자 하는 일이 인정을 받으면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만족하면서 몸이 따라준다면 능력껏 열심히 살겁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함북도 출신이 차명희 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