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폭풍 후에 무지개가 뜨는 것처럼 자신의 청춘시절은 너무 힘들었지만 이제 좋은 일만 있기 바라며 사는 탈북여성이 있습니다. 오늘은 도라지 판매 무역회사 사장 최미라(가명) 씨를 소개 합니다.
최미라: 나는 마약 중독자도 아니고 나는 중죄인도 아니고 내가 뭘 잘못했나 버리고 싶어 버린 내 고향도 아니고 다만 배고파서 그저 오빠가 팔아 넘기는 것을 알면서고 눈감고 참아준 것 뿐인데 왜 이렇게 하늘이 무심한가 싶은 거예요.
함경북도 무산군에 살던 최미라(가명) 씨는 18살 되던 1998년 중국에 넘겨졌습니다. 탈북이나 도강이란 말을 하지 않고 사람에게 넘겨졌다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최미라: 그 때 당시는 그저 배고파서 나온 거 맞잖아요. 사람들은 왜 그 사실을 감추려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북에 있을 때 다른 고장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누가 알아요. 여기처럼 차가 있어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누가 잘살고 못살았는지 알 수 있겠지만 북한은 서로 몰라요. 내고향 사람 아니고는 모르죠. 96년부터는 남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힘들었어요. 11살에 아버지 기차사고로 돌아가셨고 16살에 어머니 돌아가셨고 우리집은 최악이었어요. 진짜 너무 배고파서 그 당시에 배추뿌리도 뽑아 먹은적이 있어요.
최 씨는 부모님이 살아계셨던 북한을 그리고 11살 이전 뛰놀던 고향을 천국으로 기억합니다. 그만큼 그가 견뎌야 했던 과거가 힘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최미라: 한국에 왔는데 천국인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중국에서 최악의 상황에서 너무 힘들게 일하고 살았잖아요. 애둘 낳아서 하나는 걸리고 하나는 업고 다니면서 너무 힘들었어요. 그러다가 한국에 오니까 여기야말로 내가 옛날에 살던 천국이었구나. 옛날에 북한에 고난의 행군만 없었다면 천국이었죠. 산좋고 물좋고 좋았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그 꿈을 꿨는데 중국에서 그 꿈이 깨진거예요. 너무 힘들고 고달프게 살았던 거예요. 저는 20대 기억이 하나도 없어요. 너무 힘들다 보니까 생각이 안나요.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요.
중국에서 제일 갖고 싶었던 것이 호구였습니다. 남한에 가면 꿈에도 그리던 신분을 찾을 수 있다는 말에 앞뒤 가리지 않고 떠났습니다. 그땐 아이를 언제 낳게 될지 알 수 없는 만삭의 몸이었는데요. 중국을 출발해 남한행을 하기 위해 제3국의 경유하면서 몸에 무리가 왔고 태국의 이민국 감옥에서 그만 출산을 하게 됩니다. 당시 최 씨는 당황했고 충격에 빠져 남한에 가서는 산후 우을증에서 헤어나질 못합니다.
최미라: 담당 형사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나는 널 못건지는 줄 알았다. 행여 이제나저제나 툭툭 털고 일어나서 일하러 갈줄 알고 애를 어린이 집에 보낼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데요. 내가 사람만 보면 울었어요. 그 말이 많던 내가…전 성격이 정말 좋고 쾌활한데 사람만 보면 눈물이 나더라고요. 왜 나만 이렇게 애를 낳아 왔지? 그래서 저는 지금도 애만 보면 엄마는 한국 사람이야. 이제는 살아도 죽어도 엄마는 한국사람이고 죽어도 한국 땅이 뭍이고 싶다고 했어요. 애는 당당하게 살게 하고 싶어서 아빠는 중국 사람이고 엄마는 한국 사람이야 이렇게 가르쳐요. 애가 12살인데 지금도 그렇게 해요.
자신이 돌봐야하는 갓난 아이가 있었지만 최 씨는 자리에 눕고 맙니다. 중국에 있던 한족 남편이 곧 뒤따라 왔지만 쓰러진 최 씨를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최미라: 정말 쓰러져 있던 거는 꼬박 2년을 집에 누워있었어요. 2년됐을 때 그냥 중국에 가려고 했어요. 수면제 안먹으면 잠을 못자서 약을 먹고 자는데 꿈을 꾼거예요. 백두산 천지는 못가봤지만 큰산 연못에 물이 보였는데 하얀 큰 새가 날아오는 거예요. 나보고 타래요. 그래서 타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새가 그냥 혼자 날아가는거예요. 그래서 안돼 안돼 하면서 내가 손을 내밀면서 따라가는데 누가 내머리를 당기는 거예요. 누가 엄마라고 불러요. 애가 말이 좀 늦었는데 엄마 엄마 하면서 배가고프니까 내 머리끄덩이를 잡아 당겼던 거예요.
아직 말도 못하고 혼자 서지도 못하는 아들을 두고 더는 누워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습니다. 더는 이런 식으로 살아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기자: 그러다가 어떻게 좋아졌습니까?
최미라: 제가 일어난게 그때 애가 내 머리끄댕이를 잡아 뜯었던 때부터였어요. 힘들었는데 그래도 그때 내가 정신을 차렸던 것 같아요. 신랑보고 여보 여기는 내 생각보다 살기 힘들어 그냥 못벌어도 중국이 좋은 거 같아 옛날로 돌아가자 그랬더니 신랑이 냉큼 가자고 머릴 끄덕이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같이 힘이 나는 거예요.
생활에 변화를 주기 위해 중국을 여행삼아 갔습니다. 한번 가서 살 수 있나 보고 거기가 좋으면 남한생활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돌아가자 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지인이 사업제안을 해옵니다.
최미라: 그래서 신랑한테 그랬어요. 남들이 화장품 팔면 돈 많이 번데 얘기를 했어요. 잘 사는 형제도 많으니까 가서 돈을 빌려서 종잣돈 해서 한 번 해보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신랑이 행동에 옮겼어요. 보따리 장사 비슷하게 하려고 처음에 난 생각했던 거예요. 그런데 하다보니까 커지더라고요. 화장품 가게를 하나 차렸는데 그게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고 해서 제가 3년 반을 장사를 했어요.
잘 되던 화장품 장사가 한풀 꺽기고 벌이가 안되자 사업을 정리하고 남한으로 돌아가는데요. 이젠 몸도 마음도 완전히 회복됐고 잘살아 보자는 의욕이 충만했답니다.
최미라: 신랑이 그러더라고요. 노가다 일도 이제 남들이 뭐라고 욕을 해도 귀막고 일한다면서 날보고 봉고차를 한대 사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중고차를 한대 사주니까 열심히 일하더라고요. 부리는 사람이 4명이다가 20명 되고 40명이 되고 하면서 정말 돈을 금방 벌더라고요. 그 일을 또 몇 년 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올해 3월에 도라지 장사 시작한 거예요.
현재 전국 각지 농산물 시장에 도라지를 직접 공급하고 있습니다. 사업은 시작 단계지만 느낌이 좋답니다.
기자: 중국에서 들어오는 도라지 양도 많겠어요?
최미라: 지금은 한 주에 한 4톤씩 들여오는데 처음에는 1톤씩 들여다 팔았어요. 그것도 한 박스씩 갖다주면서 써주세요 그랬는데 보더니 품목별로 한 박스씩 가져오라 하고 다음날 또 전화가 와요. 열 박스 갖다주세요. 그렇게 늘어나더라고요. 지금은 한 집에서 1주일에 1톤씩 쓰는 집도 있어요.
최미라 씨는 30대 말에 접어들어서야 진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만들어가는 시간에선 비온 뒤 뜨는 무지개처럼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은데요. 아들은 무조건 공부시켜 대학에 보내고 이번에는 에돌아 온 행복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입니다.
최미라: 일 안하고 보낸 2년을 생각하면 내가 왜 그랬을까? 왜그랬을까 하다가도 그 시간이 있었으니 지금 내가 있는 거예요. 돈을 떠나서 그저 소소한 것에도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이 내 꿈이고 소원이예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남한에서 도라지 판매 사업을 하는 최미라(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