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게 사는게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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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에서 열차방송원으로 일했고 현재는 남한에서 남북하나재단의 동포사랑 잡지 취재기자로 활동하는 여성이 있습니다. 바로 정진화 씨입니다. 평범한 일상에 행복이 묻어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이라는 정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정진화: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이고요.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 전지역 치고도 노동자 도시라고 하는 함흥이 가장 어려웠다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아는 사실입니다.

정진화 씨는 지난 1999년 탈북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진화: 그때 당시 너무 힘드니까 중국에 이모가 있어서 어머니 친구 한 분이 여기서 고생하지 말고 한번쯤은 이모에게 방조를 받는 것이 어떤가 해서 정말 생각지도 못하다가 함경북도 삼봉쪽으로 이동을 해서 40일동안 기다리다 거기서 탈북 브로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처음엔 붙잡혀서 분주소에 3일 구류됐다가 다시 탈북해서 성공했습니다.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 시기가 닥치기 전까지 평범한 주민으로 큰 어려움 없이 살았습니다.

정진화: 제가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3년제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철도방송위원회에 들어가서 열차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순환열차 47,48 열차라고 했는데 원산을 떠나서 라진을 거쳐서 돌아오는 노선 또는 함흥을 떠나서 사리원까지 가는 함사라는 노선을 탔고 함흥을 떠나서 홍원을 걸쳐서 북청을 거쳐서 신북청 갔다가 덕성을 갔다가 다시 그날로 함흥에 돌아오는 141열차를 탔습니다.

결혼을 하고 열차방송원 일을 그만 둔 후 안해본 일이 없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고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3년 7개월을 살았습니다. 다행히 좋은 집주인을 만나 중국에 사는 친척도 모두 찾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정진화: 그때 내 나이가 30대 중반이었는데 일단은 지금도 심하지만 탈북자 검거가 심했고 그래서 큰아버지가 너는 여기서 못산다 가장 안전하게 살자면 한국으로 가야한다 그랬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생각을 쉽게 바꾼다는 것이 어려웠어요. 왜냐하면 한국은 남조선이라고 해서 굉장히 안좋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사실 거부를 했어요. 왜 나를 남조선에 보내려고 하나 나는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 했는데 알고 보니까 남조선이 그런 곳이 아니더라고요. 그 다음에는 친척들이 노력을 했는데 남한으로 가는 선을 잘 못찾았어요. 결국 친척들이 돈을 모아서 여권을 만들어서 제가 중국 장춘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 인천 공항으로 직행을 했습니다.

북한으로 돌아가는 대신 남한행을 택했습니다. 탈북브로커를 통해 남한에 가는 것이 아닌 가짜 호구를 사서 여권을 만들어 홀로 입국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지금은 중국도 호구를 전산화 해서 가짜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 하지만 2000년 초에만 해도 돈을 주고 행방불명 된 사람의 호구를 사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남한에 도착한 후에는 공항에서 자신이 탈북자라고 자진신고를 했습니다.

정진화: 그때 오전 11시에 도착했는데 사실 여권을 가졌다 해도 불법이잖아요.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 보다는 그때 친척들이 이야기 한 것이 있어요. 붙잡혀서 북송되면 안되니까 무사히 공항에서 빠져나오길 바란다고 많은 사람이 기도를 했거든요. 제가 입국장에서 탈북자라고 자진신고하기 까지 거의 5시간이 걸렸어요. 그리고 저녁에 국정원 직원을 따라서 차를 타고 서울시내로 들어오는데 진짜 도로를 꽉메운 차들을 보고 너무 놀랐어요. 중국에서 한 3년 있으면서 한국 텔레비전만 봤지만 직접 눈으로 봤을 때는 한마디로 너무 황홀했어요.

정착 초기를 떠올리면 아직도 처음 지하철을 탔던 순간이 생각나는데요. 북한에서의 직업이 열차방송원이었기 때문에 남보다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죠.

정진화: 기차를 탔는데 뭐라고 하냐면 출근길에 오르신 손님여러분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러는 겁니다. 처음에 여기도 열차방송이 있네, 솔직히 북한 열차에는 열차 방송실이 별도로 있고 방송원이 탑승을 해서 방송을 하거든요. 제가 그 차칸을 다 뒤졌어요. 방송실이 없었어요. 후에 알아보니까 북한식으로 하면 차장격인데 그분들이 열차에 오르고 내릴 때 승객에게 방송을 하더라고요. 북한은 방송원의 자격을 가진 사람만 마이크를 잡는데 여기는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진짜 신기했습니다.

남한생활 적응은 크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운이 좋았다고 할까요?

정진화: 저는 사실 처음에 와서 회사에 들어가서 컴퓨터도 배우고 문서처리도 배우고 했어요. 저는 꺼꾸로 배웠어요. 다른 사람은 학원에 가서 컴퓨터, 문서작성을 배워서 이력서 내고 취직이 됐다면 저는 지인을 통해서 우연하게 회사에 들어갔거든요. 동료가 친절하게 모든 것을 가르쳐줬습니다.

보통 탈북자가 남한에 가서 그 사회에 적응을 하고 안정을 찾기까지 3년 정도 걸린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정 씨는 정착 초기에 늦둥이를 출산하고 아이를 돌보면서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더 힘들지 않았을까 추측이 되는데요.

정진화: 저도 북한에서 전문대를 졸업했지만 여기선 그런 명함을 내밀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여기와서도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하고 지금은 인터넷을 모르면 안되니까 컴퓨터를 잘 알아야 하고 이력서를 낼때도 자기가 취직하고자 하는 분야에 전문인으로 실력을 갖춰야 하는 거예요. 내가 북한에서 아나운서를 했다고 여기서 방송공사에 취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경쟁사회란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끊임없이 자기개발을 하지 않고는 직장에 붙어있을 수가 없는 것같아요. 그래서 저도 계속 자격증을 따고 있는데 그런 끊임없는 자기개발은 꼭 취직을 위해서가 아니고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동시대인들의 똑같이 노력해야 하는 그런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 번도 남한생활이 쉽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남들과 경쟁하고 자기개발을 하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압니다. 잘 다니던 직장도 솔직히 이제 그만 나오셔도 됩니다 하고 갑자기 통보받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정진화: 솔직히 경제가 너무 어렵습니다. 자영업자도 힘들다고 하는데 저는 계속 회사에서 근무하던 사람이라…지금도 이력서를 넣었습니다. 답변을 기다리고 있고요. 내가 대학을 졸업했다. 북한에서 뭘 했는가 하는 생각은 다 버렸고요. 일하자고 하면 일할 수는 있습니다. 청소일도 괜찮고요. 일당직인데 건설업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도 많더라고요. 지금은 단체일도 좀 하고 있고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할 수 있는 많은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능력이 되는 한도내에서 사는 것이 행복이라도 말하는 정진화 씨. 생활에 충실하고 거짓없는 삶을 살기위해 애쓴답니다.

정진화: 지금 행복을 느끼는 것은 아이를 보면서죠. 아들이 중학교 3학년인데 처음에는 두려웠어요. 여기에서 결혼연령대가 아무리 높다해도 저보다 10년은 아래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데 그분들같이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정말 두려웠어요. 그런데 지금은 중학생이 되고 보니까 키가 큰 것은 물론이고 솔직히 저의 대화 상대가 되요. 아이를 보면 정말 기뻐요. 아들이 정말 잘자라서 감사하고 그것이 제일 행복합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함흥 출신의 정진화 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