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각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모습을 그리며 삽니다. 누구는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길 꿈꾸며 살고 또 어떤 사람은 돈보다는 명예로운 삶을 살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욕심 없이 평범하게 살려고 하는데요. 오늘은 여자로 태어나 한 가정의 아내로 그리고 엄마로 살고 싶다고 말하는 남한생활 10년차 박해미(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박해미: 제가 지옥에서 천국으로 왔는데 뭘 후회하고 뭘 아쉬워하겠어요.
현재 남한에 사는 박 씨는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나 지난 1990년대 후반 생존을 위해 중국을 오가며 생활했습니다.
박해미: 저는 두만강 옆에서 낳아 자랐으니까 옆에 바로 중국이 보이고 중국에 친척이 있었고 엄마도 아가씨 때 국가에서 내준 여권으로 중국에 있는 고모부 보러 갔다 왔고 가장 아사가 많았던 96년부터 98년에 이미 한 번 가서 도움 받아서 굶어 죽는 식구들을 한 번 살렸고 자주 다녔어요.
그렇게 10년 동안 중국을 오가면서 생계를 이어 갔습니다. 중국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북한에서 생활하다 또 돈이 떨어지면 중국을 찾았던 겁니다.
박해미: 제가 중국을 많이 다녔는데 조선족들은 중국 드라마 안보고 전부 남한 드라마 다 봐요. 그래서 일하면서 같이 보게 되죠. 그런데 북한에서는 좋은 것만 방송에 내보내잖아요. 그래서 남한도 좋은 것만 내보내나 보다 했는데 조선족 분들이 한국 다녀왔다면서 다 진짜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50년 세뇌교육을 받고 해서 못 믿었죠. 그렇게 10년을 중국 다니고 한국 드라마를 본 내가 한국 땅 와서 깜짝 놀랐어요. 내가 이렇게 한국을 몰랐나? 왜 그렇게 몰랐는지 억울하더라고요.
박 씨가 남한 행을 결심하기까지는 데는 10년 세월이 걸렸는데요. 그 동안도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3번이나 중국에서 북한으로 잡혀 나갔던 겁니다. 그런데 2007년 북송 당해서는 심한 고초를 당합니다. 보위부에서만 3개월을 있었고 반죽음이 돼서야 나올 수 있었습니다.
박해미: 4월에 잡혀 나갔는데 보위부 구류장에서 나온 것이 8월이니까… 앞이 안보이고 걷지를 못했죠. 그런데 감옥은 안가고 노동단련대로 가게 됐더라고요.
박 씨가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잡혀 나갔을 때는 집을 떠난 지 1년만이었는데 북한은 그사이 정말 많은 것이 변해 있었고 더 이상 자신이 살수 없는 땅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박해미: 조국의 변화라는 것이 무조건 탈북 하면 감옥 보내는 것 하고 빙두라는 마약이 간부들로부터 많이 퍼져있다고 보면 되요. 마약을 하는 것에 놀랐어요. 통제를 한다고 노동단련대에 빙두한 사람이 많이 들어왔고 도강자들은 거의 감옥에 가고 별로 없고 그 다음에 직장 출근 안 한 애들이요.
노동단련대에서 나와서는 다시 탈북을 했고 제3국을 거쳐 2009년 남한에 입국합니다. 북한에서도 인텔리였던 박 씨는 남한에 도착해 일보다 대학에 입학하는 배움의 길을 택합니다. 박 씨에게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은 공부였습니다.
박해미: 여기는 사회복지를 배워도 외국 학자들 이름이나 법칙이 영어로 돼있어서 첫날부터 교수님 보고 우리말로 풀어서 말해주면 안됩니까? 왜 이름이나 법칙을 그냥 영어로 말씀합니까? 저는 러시아어를 배워서 모르겠네요 하니까 교수님이 6개월동안 풀어서 말씀을 해주셔서 알았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영어로 말을 하는 이유가 있구나 하고 알았어요. 그래서 제가 최고 4.5점을 받고 졸업했거든요. 그리고 4년동안 탈북 대학생에게 주는 천일장학재단 장학금을 받았어요.
물론 처음에는 영어 때문에 고생을 했지만 성적도 최고였고 새로운 지식을 쌓는다는 것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졸업을 앞두고부터 갑자기 알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박해미: 진짜 미치겠어요. 왜 아픈지 그게 억울할 뿐인데 그것도 그 나라가 내게 준 선물이라고 의사 선생님이 하더라고요. 다른 환자들은 남자, 여자 이성문제로 우울증이 오지만 나는 지난날의 삶의 그림자가 왔다고 하니까 내가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그 나라는 거기서도 죽지 못해 살아가게 하더니 여기까지 병이 따라와서 힘들게 하는구나. 지옥에서 천국에서 온 느낌이죠. 후회할 것 없어요. 늦게 온 것이 잘못이지.
지난 5년동안 병원에 입원하지 않은 달이 없었고 진통제 주사를 맞지 않으면 숨쉬기 조차 힘든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병원에서 박 씨에게 내린 진단명은 섬유근통. 원인이 뭔지 의학적으로 정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정신적인 충격과 신체의 호르몬 변화 같은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고통을 주는 병입니다. 온몸이 쑤시고 가벼운 접촉에도 아픔을 느끼면서 밤에는 잠을 잘 수가 없고 하루 종일 피곤함을 느끼는 병입니다.
박해미: 지금은 스트레스 받는 일도 없고 한국에 와서 행복한 일밖에 없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 없습니다. 이 병의 모든 원인은 스트레스거든요. 그런데 저는 스트레스도 없고 행복한데 왜 이렇죠 했더니 의사 선생님이 하는 말씀이 지난날의 삶의 그림자가 앞에 와 있어요. 한참 아플 갱년기 시기와 겹쳤기 때문에 많이 아플거라고……
대학 4년에 그리고 그 다음 5년은 병원을 오가면서 보낸 세월이 남한생활 10년 입니다.
기자: 남한에서 그 동안 일은 한번도 안 해보셨나요?
박해미: 일할 형편이 아니었어요. 학교 다니고 병원 생활을 계속 하다 보니 일은커녕 개인생활이나 제대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날의 삶의 그림자로 인해 현재 고통을 받고 있다는 박 씨. 그리고 자신의 과거가 지옥이었다고 말하는 박 씨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박해미: 북한에서는 가정이 없었죠. 아들을 엄마한테 맡겨놓고 돈 벌러 다니는 여자의 생활이었는데 10년동안 여자의 인생이 얼마나 파란만장 했겠어요. 여기 오니까 일단 내 집이 있고 내 남편이 있고 내 아들 같이 있어요. 난 평생 살면서 남편을 북한 당국 때문에 두 번 잃고 나니까 항상 그리운 것이 여자가 되고 싶었어요. 한 남자의 아내, 한 가정의 엄마, 한 아들의 엄마인 여자로 살고 싶은 것이 내 소원이었는데 한국에 와서 여자로 살고 있습니다. 그것 이상으로 더 바랄 것이 없어요.
정말 평범하게 행복을 느끼고 살고 싶은데 지금은 그것이 마음처럼 안돼 속상하다는 박 씨. 하지만 의사 선생님이 조만간 치료제가 나온다고 했으니 조금만 더 참아보자며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고통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박해미: 평생 삶의 한발한발이 사느냐 죽느냐였어요. 잃고 잃고 잃고 사느냐 죽느냐 그러다가 여기 왔으니까. 더 말할 것 없죠. 내가 3.8선부터 제주도까지 다 돌아보겠다고 했는데 제주도만 두 번 갔다 왔어요. 여기 전라남도도 다 못 돌아다녔어요. 공부하고 아프다 보니까요. 그리고 아들이 캐나다에 유학을 갔는데 너무 좋데요. 나도 한번 캐나다든 미국이든 가보고 싶고 내가 거쳐온 태국도 가보고 싶고 한데 내 건강이 허락을 하겠는지 모르겠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무산 출신의 박해미(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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