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는 풍년났고 봉사는 행복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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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탈북자들은 남한에 가면 최소 세 번은 놀라게 됩니다. 모든 것이 풍요롭다는 것에 놀라고 그에비해 자신은 빈손이구하 하는 점에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나눔을 실천하는 봉사활동이 있음에 놀라게 되는데요. 오늘은 남한생활 12년이 되는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김혜진 (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혜진: 집안에 들여놓은 것은 총 150만원어치였어요. 가장 기본적인 것만 가지고 살았죠. 그렇게 한 7년을 살다가 돈을 조금 모아서 그다음 부터는 가정살림 일체를 다 바꿨죠.

정착초기에는 빈손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살림을 하나씩 장만했다는 김 씨. 그는 지난 2005년 7월 탈북해서 그 다음해 겨울 이미 탈북한 아들이 살고 있는 남한땅을 밟았습니다. 북한에서는 20년 넘게 부기원으로 일했지만 남한에 가서는 자기가 하던 일을 계속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먹고 시작한 것이 사무직에 필요한 컴퓨터 공부고 이후에는 직장생활을 합니다.

김혜진: 그것을 병원에 다니다가 …정직원만 계속 다닐 수 있는데 젊은 사람이지만 계약직이 많았어요. 저는 아는 분의 소개로 3번 재계약을 하고 다니다가 나와서 그 다음에는 작은 회사의 경리로 들어갔죠.

남한에 간 탈북민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정착 초기에 북한출신이라 차별받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몇 년 살아보고는 대부분 자기가 오해를 했었고 자격지심에 과민반응을 보이며 대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 좋아졌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눈물은 웃음으로 변합니다.

김혜진: 거의 1년 6개월이 되니까 생활이 안정됐어요. 그리고 월급도 병원이라 좀 많았고요. 그러니까 생활에 대한 걱정이 좀 덜하더라고요. 그전에는 제가 손에 쥔 것이 하나 없지 여기서 일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했어요. 아들은 와서 공부하지, 벌이는 마땅치 않지 앞으로 어떻게 살까 괜히 왔다는 생각까지 처음에는 했어요. 그런데 제가 컴퓨터를 배우고 나선 달라졌어요. 누구 소개를 받자해도 제가 준비가 돼있어야 겠더라고요. 거의 2년 되니까 한국 오길 참 잘했다. 그다음부터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탈북자들에게 처음에 남한사람이 흔히 하는 질문은 남한을 본 소감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겁니다. 남한생활이 10년이 흘렀지만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똑같은 질문을 기자가 해봅니다.

김혜진: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는 눈에 풍년이었어요. 하지만 현실은 달라요. 아무리 눈에 풍년이라고 돈이 없으면 안되더라고요. 지금도 아들보고 그래요. 자본주의 사회란 것이 어머니 없이는 살아도 돈이 없으면 못사는 세상이다. 돈이 만능은 아니지만 그래도 생활할 수 있는 초보적인 돈은 있어야 한다. 북한에서는 세금없는 나라이니 국가에서 주는 것은 없어도 세금 내는 걱정은 없었죠. 그런데 여기 오니까 돈을 버는 대신 세금을 내야 하잖아요. 우리는 한국 국민과 똑같이 내야 하니까 손에 쥔 것은 없지 참 마음이 급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눈에는 풍년이지만 돈을 아껴야 하니까 그때는 길을 가면서도 5천원짜리 옷만 사입었어요. 만원이 정말 큰 돈이더라고요. 그래서 3천원, 5천원짜리를 사서 입었어요.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단위가 높아가면서 지금은 10만원도 무섭지 않게 옷을 입게 되더라고요.

취직을 하고 생활이 나아지면 많은 탈북자가 장만하는 것이 자동차입니다. 당연히 많은 수의 탈북자분들이 그렇듯 자가 운전을 하고 다닐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아니었습니다.

김혜진: 저는 자동차 현재 안샀어요. 2011년에 저도 운전면허를 땄어요. 그런데 자동차를 사려니까… 저는 북한에서 부기원을 해서 그런지 계산적이예요. 자동차를 사면 물론 좋겠지만 돈이 많이 들어가잖어요. 그런데 제가 차를 타고 다니면서 돈 벌일이 없어요. 여기는 대중교통이 얼마나 잘됐어요? 환승도 되지 하니까 아직은 자동차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안합니다.

생활에 안정을 찾은 다음에는 그간 정신없이 살면서 살펴보지 못한 주변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전에 안보이던 면이 차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요. 그러면서 시작하는 것이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는 일을 찾는 겁니다. 김 씨도 마음이 끌리는 일을 찾았습니다.

김혜진: 그 다음에는 마음의 여유가 좀 있어서 친구들과 놀러도 다니고 문화생활도 좀 하고요. 취미는 저는 기본이 자원봉사하는 것이예요. 2008년부터 했어요. 와서 한 2년 있다가 일찍 자원봉사를 시작했어요. 굿피플이라는 큰 NGO 단체가 있는데 거기에 의료봉사단에서 봉사를 해요. 때로는 친구들과 놀러도 가고요.

북한주민에게는 좀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요. 자원봉사란 사회 또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기 의지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좀 더 쉽게 풀어 얘기 하자면 나를 위한 일이 아닌 누군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눠준다는 겁니다.

김혜진: 처음 봉사를 접하게 된 것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보니까 한국에 큰 봉사단체가 있더라고요. 그것을 보고 나도 할 수 있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너무 큰 단체는 아니고 작은 굿피플이라고 선한사람들이란 봉사단체에 전화를 했어요. 생각에 봉사를 하고 싶더라고요. 저는 여기서 4년제 대학 사회복지학과를 나왔거든요. 전화를 하고 찾아가서 봉사를 했는데 첫날 봉사를 하고 집에 오는데 마음이 너무 좋더라고요.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또는 먹고 살기 바빠서 좋은 일인줄 알면서 못하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만큼 봉사활동에 참여하기 어렵다는 말인데요.

김혜진: 봉사란 것이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못해요. 아무리 시간이 있어도 안하는 사람은 안하죠. 내 시간이 없어 못한다는 것은 핑계인 것같고요. 저도 피곤하지만 한달에 한 번 봉사를 하면 그때를 기다리게 되더라고요. 오히려 봉사를 하고 오면 마음도 좋고 피곤한 것을 모르겠어요.

누군가에게 내가 도움이 됐다는 것에 마음이 너무 좋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봉사하는 날이 되면 기다려진다고 하는데요. 남한에서 시작된 제2의 인생. 어떤 것일까요? 직업 중에 커피를 전문으로 만드는 사람을 바리스타로 부르는데요. 김 씨는 작지만 알콩달콩 사람사는 맛이 나는 카페 사장이 꿈이랍니다.

김혜진: 저는 현재 커피숍을 하고 있어요. 바리스타예요. 지금은 전문가가 됐어요. 햇수로 4년차인데요.

남북하나재단에서 우리 탈북자들의 자립을 위해 카페를 하나 내줬어요. 여기서 전문성을 익혀 창업을 하라는 취지인데요. 여기서 지금 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힘닿는데까지 건강이 허락하는데까지 지금 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김혜진 (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